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전2:2)-로이드존스

제가 이 본문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데는 그럴 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한 가지는 제가 이 교회에 방문한 첫 주일 저녁에 설교했던 본문이 바로 이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하 지만 이 본문을 택한 이유는 단순히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저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셨기에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제가 이 본문으로 설교했을 당시 어떤 내용을 전했는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원고를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이 본문으로 설교했던 그때도 이 말씀이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또다시 이 본문을 선택한 이유도 그때와 똑같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현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들이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노력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여 러분이 기억하시는 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첫 장에서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처음 고린도교회를 방문했는지 되짚어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고린도에 교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한 결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바 울이 세운 고린도 교회는 매우 큰 교회, 번창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다른 요소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사도가 이 서신을 보낼 무렵 고린도교회는 매우 어지럽고 불안정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바울이 이 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사이에 떠돌아 다니는 말과 그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확신하고 있는 것들이 복음의 기초를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처음에 그들에게 전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에게 전했는지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제 가 이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한 것은 그것이 지금 시대에도 똑같이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밤 저는 세상의 상태를 알려주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위기와 재난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일 아침 조간신문에 어떤 소식이 실려 있을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이 세계는 거의 모든 면에서 붕괴되고 있습니다. 고통의 시대요, 매우 혼란한 시대입니다.

이 런 때 대두되는 질문이 바로 '이 시대에 교회는 답변할 말을 가지고 있는가? 교회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오늘날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각 개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느낀 바로는, 사도 바울이 이 본문을 통해 바로 이런 질문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에 의해 선포된 이 위대한 선언에 주의를 기울이기를 여러분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 러분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이것은 하나의 결단입니다. 매우 의도적인 결단입니다. 아무렇게나 내린 결단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을 살핀 후에 이 결론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어 떤 학자들은 사도 바울이 과거에 큰 도시 아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으로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사도행전을 익히 알고 있다면,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간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한 아덴에서 그의 사역이 중단되었고, 게다가 그리 성공적이 아니었다는 것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아덴에서 전한 설교에는 헬라 시인들의 시들을 인용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바울이 헬라 학자들을 인용하고 헬라 문학에 대한 지식을 보여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덴에서의 사역이 실패로 돌아가자 아덴에서 고린도로 오는 길에 '아, 다시는 이런 식으로 하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결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저 는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해석을 전적으로 거부합니다. 그 이유는 한두 편의 시를 인용했다고 해서 그의 메시지의 핵심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설교했을 것입니다. 그는 어디서나 이것을 전했습니다. 그는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이 위대한 주제만 설교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결단이 아닙니다. 원래 했던 결단의 반복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들 가운데서 그가 실제로 무슨 일을 행했는지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많 은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아주 신중하게 이런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그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고, 박식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결단은 아주 중대한 것입니다. 그는 3장과 4장에서 좀더 깊이 이 부분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3장에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18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뒤에 자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헬 라어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은 '헬라 사람들에게 무식한 자로 취급받았다'는 의미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아주 명석하고 위대한 철학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철학이나 다른 것은 말하지 않은 채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한다면, 그들이 자신을 무식하고 어리석은 자로 여길 것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좋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의도적으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계속 그런 식으로 처신했습니다. 모든 것을 배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알기로 의도적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아덴의 학식 있는 사람들에게 어리석고 별 볼일 없는 연사로 취급당하기로 의도적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그 가 첫 장에서 이미 말한 바대로 그의 메시지는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터무니없이 어리석은 소리라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유대인이었기에 유대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이 십자가의 도가 참으로 거치는 돌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넌센스로 여겨질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어떤 목수를, 게다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을 세상의 구세주라고 하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믿는 것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도적으로 이렇게 설교하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메시지를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 알면서도 내린 결단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의도적이었습니다. 위대한 사도는 의도적으로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지 않겠다는 이 결단에 이른 것입니다.



다 음과 같은 질문을 해봅시다. 왜 바울은 이러한 결단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왜 바울은 그런 식으로 처신하기로 결단했을까요? 그리고 왜 저도 동일한 결단과 결론에 이르게 되었을까? 왜 바울은 그러한 결론에 도달했습니까? 오늘날 설교자들은 왜 이 동일한 결론에 이르러야 할까요?

저 는 오늘날 교회가 능력을 잃고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는 이유가 바로 이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교회가 정반대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고, 잘못된 방식으로 각 사람들의 취향에 맞추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위대한 사도가 이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확실히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가 그런 결단을 내린 이유를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 론 오늘날의 견해는 그런 결단과는 정확히 반대의 입장에 있습니다. 오늘날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만약 교회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잇는 것에 대한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전하는 것은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얘기되어 왔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소수의 사람들의 지지는 얻겠지만 대중들에게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원한다면, 그들을 인도하길 원한다면, 그들이 관심을 두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러나 이런 논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아덴과 고린도를 방문했던 이천 년 전에도 이런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줄 사람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시간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행17:21). 그들은 듣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방문했을 때에도 "이 말쟁이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라고 말하며 궁금해 했습니다. 그들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그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서만 말해주길 원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그 사람들의 일부는 유대인이었고, 아마 나머지 사람들은 주로 헬라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바울이 무엇을 말하기를 바랐을까요? 물론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율법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율법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항상 그것에 대해서만 논쟁하고 토론했습니다. '율법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인 계명이 무엇인가?' 율법에 대해서 논쟁하고 각 계명이 가지고 있는 유익들을 토론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큰 기쁨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면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 리는 헬라인들이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헬라인들은 철학이라는 것에 기본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헬라인들은 여러 가지 방문에서 이 세상에 살았던 인종들 중에서 능력이 탁월하고 지적으로 우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배출한 민족이 바로 헬라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바울이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그리스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입니다.

헬 라인들은 철학적인 문제에 굉장한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철학이란 인생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같은 세상에서 지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문제와 아픔과 고통을 보면서 술이나 마시고 이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왜 이럴까?', '문제가 무엇인가?', '이렇게 된 상태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서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탁월한 머리를 가지고 이러한 생의 문제들을 연구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 론 이것에 반대되는 가르침과 입장이 잇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대학이나 학파에 해당하는 학원을 세웠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학파에 관해 읽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내세우면서 사람이 어떻게 해야 유토피아, 즉 완벽한 상태에 이를 수 있을지 논쟁했습니다.



철 학의 또 다른 분파는 문화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문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는 그 의미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유명한 클라크 경이 TV에서 '문명'에 대해 강의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헬라인은 건축에 관한 한 전문가였습니다. 그들은 장엄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습니다. 아테네에 가면 지금도 그 건물들의 잔해를 볼 수 있고, 그 잔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방문할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들은 정말 위대한 건축물입니다. 일반 문화, 건축, 문서 등에 대해 헬라인들은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예 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형태의 예술이든 관심을 가졌습니다. 헬라인들은 예술에 대해 토론하기를 즐겼습니다. 또한 스포츠에 대해서도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올림픽 경기에 매료되곤 합니다. 그러나 올림픽 경기를 시작한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바로 헬라인들입니다. 마라톤, 올림픽 경기 등은 그들이 붙인 이름입니다. 지적으로 우수한 그들이 시작하고 발전시킨 것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헬라인들에게 관심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생활, 도덕, 행위, 윤리 등 이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바 울은 이런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헬라인들이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것들 중 한가지라도 이야기를 하면, 헬라인들은 누구라도 관심을 가질 것을 알았으며, 강연할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또 인기를 얻을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문제들을 언급할 만한 지식과 능력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런 모든 주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는 헬라인들에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기를 결단한 것입니다.



그 렇다면 이제 이 질문을 생각해봅시다. 왜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을까요? 왜 그는 그런 결단을 내렸을까요? 다행히 그는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 답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세 상의 지혜는 없어질 지혜입니다. 허사로 돌아가고 말, 아무 것도 아닌 지혜입니다. 왜 바울은 철학을 설교의 주제로 삼지 않았을까요? 왜 그는 정치에 관해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는 문화나 예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다루지 않았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 옳은 것일까요? 검증해봅시다. 그가 썼던 서신에서 그가 했던 말을 통해 살펴봅시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관심을 가지던 율법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바울은 바리새인들이 항상 해오던 방법대로 율법의 세밀한 문제를 계속 거론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는 율법을 해석하는데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까요? 그는 많은 곳에서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예 를 들어, 로마서 3장 20절을 보면,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줄 뿐입니다. 우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진흙탕 속에서 굴복하게 만듭니다.

로 마서 8장 3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사" 다른 말로 말해서 율법은 실패했습니다. 즉 아무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많은 토론을 벌였던 율법을 그 누구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오로지 사람들을 정죄할 뿐입니다. 율법은 사람의 필요와 상처를 노출시키고, 사람들을 소망 없는 곳으로 완전히 내동댕이칠 뿐입니다.

바 울과 저는 율법을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완전히 소망 없는 상태에 버려둡니다. 우리는 다른 문제에 있어서도 이를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왜 바울은 철학에 대해서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철학은 허사로 돌아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철학을 인간의 지혜, 이 세상의 지혜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세상이 알고 있는 위대한 철학자들이 이미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위대한 가르침을 베풀었고, 그들의 계획을 제시했고, 유토피아에 대한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일 반 역사에서 뽑아본 통계는 다른 부류의 사람들보다 철학자들이 자살률이 더 높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철학은 실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지혜와 지식이 모든 시도를 다해볼 때까지 자신의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그것들이 허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철 학은 문제 제기를 아주 잘합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운 위대한 지도자였던 토마스 마사리크(Thomas Masaryk)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을 해석하기만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다른 견해와 해석을 제시하는 데 명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있는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합니다. 세상이 정작 요구하는 것은 변화입니다. 어떤 철학자들도 이 세상을 변화시킨 적이 없습니다. 절대로 그런 적이 없습니다.

옛 세상은 이 탁월한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어떤 상태였습니까? 제가 따로 설명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로마서 1장 마지막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사회의 상태였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과 그 문화, 로마의 법률, 정치에도 불구하고 다음에 언급하는 내용이 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또 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롬1:28-32)



사 람들은 철학자들의 위대한 가르침을 따르는 대신 이런 방식으로 살아왔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하기 전에 무섭고 추한 성적인 변태 행위들도 지적했습니다. 남자들이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남자들끼리 성관계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몸을 부끄럽게 했다고 말입니다. 온 세상이 더러움 속에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유토피아, 정치, 사회적인 개혁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실제 삶은 추악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바울이 옳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허사요, 실패요, 헛된 노력이었습니다.



오 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수세기를 통해서 지속되어온 진리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동일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형태로 이것들을 드러내고 있지만,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은 허사로 돌아갈 것들을 신뢰해왔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기를 그만두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믿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철학입니다. 위대한 철학자들입니다.

여 러분은 원하기만 하면 TV나 라디오를 통해서 지금도 철학과 정치를 신봉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잇습니다. 우리는 정치가 사회의 모습을 바꿔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50년 전에 제가 여기 왔을 때에도 람세이 맥도날드(Ramsay Macdonald)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런 확신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정치가 세상을 바르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신화나 요정 이야기 같은 넌센스가 아니라 교육, 문화, 새로운 지식, 과학, 이성, 철학이 완벽한 세상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것들 모두는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 는 바울이 당시에 말했던 것이 오늘날에도 동일한 진리라는 사실을 여러분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아무 것도 아닌 허사일 뿐이라는 진리입니다. 제 말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론 우리가 그것들을 통해 얻는 특별한 유익도 있습니다. 그 유익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와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참된 삶, 평화, 행복, 기쁨에 관한 문제에 직면하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그 모든 것들이 허사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 주제에 대해서 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 '전쟁과 평화'와 다른 걸작들을 쓴 작가 톨스토이가 한 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했던 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생의 의미 없는 부조리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명백하고 유일한 진리이다" 그는 인생의 의미 없는 부조리가 유일하게 분명한 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말을 생각해봅시다. 오늘날 사회학과 정치적인 문제에 전문가인 모리스 긴스버그(Morris Ginsberg)라는 사람은 최근에 다른 같은 말을 했습니다. "현대 심리학적인 이론들은 지적인 진보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를 개선시킨다는 초기의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던 것이 얼마나 단순했던가를 폭로하고 있다" 바로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들이 그렇게 추측했습니다. 그들은 지적인 진보가 필연적으로 인간관계를 개선시킬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지적인 향상을 이루게 해라. 그러면 인간관계는 나아질 것이다" 이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976 년 앨버트 맨스브리지(Albert Mansbridge)라는 사람이 태어난 지 백 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제가 이 사람을 언급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노동자 교육협회(WEA)를 만든 사람입니다. 저는 노동자 교육협회 모임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얼마나 알려져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50년 전에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노동자 교육협회 강의실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앨버트 맨스브리지가 무슨 말을 했나요? 그는 1903년에 노동자 교육협회 강의를 창설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동자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요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 생각에 있어서 그보다 더 정직하고, 더 진지하고, 더 성실한 사람은 없었을 정도로 그는 실제로 그렇게 믿었고,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믿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했던 수천 명의 사람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만약 사람들이 교육에 노력을 쏟아 붓는다면, 대중들이 교육을 받기만 한다면, 우리 시대가 안고 있는 주요한 사회적인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 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탤벗(Talbot) 항구의 애버러본(Aberavon)에 지금 사회적인 문제가 없어졌나요? 백 년 전, 또는 오십 년 전보다 문제가 훨씬 줄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 각자에게 맡기겠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위대한 역사가, 세계 역사에 관한 열 권의 책을 구상했다가 결국은 열두 권의 책을 출간한 사람,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ynbee)입니다. 그의 마지막 책제목은 "인류와 어머니 지구(Mankind and Mother Earth)입니다. 토인비는 한평생을 다 바쳐서 인간에 대해 연구하고 역사의 관점으로 세계와 인생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학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공헌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더 나아지고 개선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었을 때 저술한 마지막 책에서 토인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인류의 발달에는 도덕적인 공백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물리적인 힘을 점점 확대해 나가면서 환경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에 부합하는 사회적인 제도는 개선시킬 수 없었다.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을 잠재우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인간의 활동이 진보를 이룩한 유일한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뿐이다."

아 놀드 토인비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인문주의자입니다. 그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철학과여러 가지 사상들만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일하게 진보한 분야는 과학기술 분야뿐이라는 옳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 리는 사람을 달에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술의 발전에 상응할 만한 사회적 제도의 발전이 있었습니까? 인간의 파괴적인 열정을 다스릴 해결책을 찾아냈습니까? 지난 수년 동안 뛰어난 기술은 중력의 힘을 정복하고 달 표면에 사람을 착륙시켰습니다. 놀라운 일을 해냈습니다.

그 러나 인간의 파괴적인 욕망을 감소시키는 일에는 성공했습니까? 여러분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신문을 읽어보고 뉴스를 들어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도 그것들을 공정하게 바라봄으로써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마 지막으로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말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뛰어난 소설가인 그는 오랫동안 과학적 인문주의라고 불리는 것을 믿어 왔고, 그의 소설 속에 그런 내용을 담아 왔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학적 인문주의가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에 신비주의로 돌아갔다가 불교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헉슬리는 여전히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여 러분이 그의 전기를 읽는다면 그가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말을 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인생과 삶에 대해 정말로 많은 관심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했습니다. 그는 세상이 더 나은 모습이 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원자폭탄, 수소폭탄으로 인해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일생동안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썼습니다.

그 러나 생애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헉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평생 인간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충고가 '좀 더 신중해지도록 노력하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없어서 정말 당혹스럽다." 뛰어난 철학과 과학적인 사고 끝에 그가 우리에게 남긴 말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좀 더 신중해지도록 노력하라."



이 제껏 말씀드린 사람들은 모두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교육, 지식, 문화, 철학,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한결같이 동의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위대한 사도였던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 6절에서 우리에게 했던 말을 확증하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 나에게는 지혜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 지혜가 아니다. 너희는 내가 이 세상의 지혜를 말하길 바라지만, 나는 세상 지혜를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 지혜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속이 텅 빈, 공허한 것이다. 세상 지혜를 통해 너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좀더 신중해지기 위해 노력하라'라는 권고만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얼마나 철저한 파탄이자 완전한 실패인가!"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의 세상이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믿었던 모든 것이 그들을 현재의 혼란 상태에 이르게 했습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합니다. 아무런 소망도 제시하지 못합니다.

사 람들이 약속을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믿나요? 사람들 스스로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은 완전히 속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혹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어디에 잇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텅빈 공허함, 허무함, 소망의 완전한 상실, 궁극적인 절망.

제가 이런 문제들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부정적인 생각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끝장났다는 것과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 러나 저는 여러분을 부정적인 생각에 머무르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겠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왜 모든 복음전도자들이 이렇게 말해야 할까요? 왜 오늘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온 세상에 전해야 합니까? 바울은 왜 이것을 전하기로 결단했습니까?



여 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을 전하도록 명령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위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소 사람 사울, 바리새인이자 신자들을 핍박했던 그가 살기등등한 태도로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자 예루살렘에서 다메섹으로 내려갔던 일을 말입니다. 그는 갑자기 한 줄기 빛을 보았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는 "주여 뉘시오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 후에 그는 위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명은 종과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복음전도자가 될 것과, 주님과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단한 것입니다. 바로 그것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것은 공적인 정직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나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라고 말합니다. 사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생각한 바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는 매우 악한 사신입니다. 사신의 사명은 자신을 임명하고 파송한 국가의 생각과 입장을 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생각과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신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신의 사명은 자신에게 어떤 전갈이 주어지든 간에 그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그 문제에 대한 선택권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나는 내 이론이나 생각을 전하려고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주님이 나에게 주신 것만을 전하도록 선택받았다." 그의 서신을 읽어보십시오. 읽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한 문헌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전파였습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내가 생각했던 것과 철학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계시입니다. 위임받은 것입니다. 명령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공적인 사명에 순수하고 정직했기에 자신이 보냄을 받은 목적, 명령받은 메시지만을 전한 것입니다.



그 러나 이유가 그것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 바울은 그것만을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10절)

왜 바울은 정치나 예술이나 문화나 철학에 대한 것은 전하지 않았습니까? 그가 갖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 하나님의 증거에 관한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은 세상이나 인생에 대한 인간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모 든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견해가 우리에게 계시되어 있다면, 왜 우리는 결국 허사로 끝날 인간의 생각을 전하면서 힘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TV와 라디오와 그 밖의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하는 학식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느라 피곤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사물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에 관한 한 전문가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증명하거나 입증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독단적인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에 지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세상이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 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우리는 한 세기 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었습니다. 첫 번째 전쟁은 오십 년 전에 제가 여기 왔었을 때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또 한번의 세계 대전을 치렀습니다. 우리는 폭격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습니다. 사회의 파괴를 보았습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의회의 법령들도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법규들이 있지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많은 법규들이 있지만 문제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것일까요? 인간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들을 만족시킬 답변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답변이며, 그분의 말씀입니다. 왜 세상이 이 모양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그것은 인간의 반역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완벽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상태의 사람을 만드셔서 아무런 문제와 난관이 없는 낙원에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완벽했던 세상, 낙원이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된 이유는 바로 인간들이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외칩니다. "아,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들은 스스로 혼돈에 빠져버렸고,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낙원 밖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다시 낙원으로 돌아가려고 몸부림치면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은 결코 낙원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세상은 혼란과 혼동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답변이고, 그분의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겪었습니까? 그런데도 왜 또 세계대전을 일으키려고 하고 있습니까? 왜 사회는 우리 눈앞에서 붕괴되어 갑니까? 왜 부도덕, 악, 혼란, 불행,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이 만연하고 있습니까? 왜 사회적, 도덕적 문제가 끊이질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그 유일한 설명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도 기억하다시피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이미) 나타나나니(롬1:16-18)

그 는 이것을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라고 말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을 전하는 동기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이유라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이것만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사람들에게 유일한 소망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 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것이 지금 이 세상이 고통 당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20세기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교육, 문화, 철학, 정치,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시도가 있었음에도 세상은 점점 더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사57:2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 러분은 호주머니를 돈으로 가득 채울 수 있습니다. 배움을 통하여 많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절대로 평강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들은 돈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돈, 학식, 지식을 가졌습니다만 평강은 얻지 못했습니다. "궤사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잠13:15).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한번 보십시오. 어렵고 불행합니다. 세상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약이나 알코올에 손을 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것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우리 위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계속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 행복을 허락하시지 않으십니다. 바벨탑을 파괴하셨던 것같이, 그분께서는 우리가 세운 바벨탑, 우리가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들을 파괴하십니다. 빅토리아 시대가 그것을 확증하고 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이 신뢰하던 것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대항하고 잇는 동안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한 유일무이한 설명입니다.



저 는 정치 이야기보다 더 중요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정치가들은 현재 세상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헤매고 있습니다. 정치가들의 모든 예언은 거짓임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들의 예언을 신뢰하던 자들은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도 덕과 과학적 지식을 소유했던 사람, 불쌍하기 그지없는 웰즈(H.G.Wells), 여러분은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궁지에 빠져버린 이성'(Mind at the end of its tether)입니다. 그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고, 이해하지도 못했습니다.



하 나님께서는 진노 가운데서 우리들을 내려다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분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과 영예를 위해서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기 전까지는 절대로 평강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바 울은 "저는 여러분에게 다른 것들은 전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에게 전해야 하는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심오한 진리만을 전하기 원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인간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분석을 들을 준비가 되셨습니까? 사람들의 헛된 말들에 지치지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은 우리의 상태와 온 세상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을 들으셨습니까?



저 는 바울이 부정적인 것들만 말하고 끝내 버리지 않은 것에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바입니다. 그 부정적인 진술들은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진단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진단만 내리고 나서 말을 맺지 않았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한 그 자리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7절)

이것이 바로 확실한 해결책입니다.

여 러분은 미래에 대해 희망적입니까? 미래를 기대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남은 생애와 죽음의 순간을 미리 본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 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 말씀에 -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우리 개인과 우주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부터 준비되고 예정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이제 실행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런데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말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그것은 인간의 모든 계획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역사 속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기다립니다. 어떤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위대한 인물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언론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그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때, 항상 '위대한 인물'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그 위대한 인물에 대해 언급합니다. 세상은 항상 그런 인물을 기대하고 바랐습니다.

이 것이 과연 하나님의 계획일까요?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분이 누구십니까? "그분은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으로,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하지만 정말 대단한 위인이죠" 이것이 적절한 대답입니까?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우리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관원들은 그분이 어떤 분인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단지 한 인간으로 여겼습니다.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여기에 하나님의 해결책이 있습니다.



사 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가 복음을 즐거워하는 이유입니다. 오직 이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어떤 분을 주셨다고 말씀하셨나요? 위대한 철학자인가요? 위대한 정치가를 주셨다고 했나요? 아닙니다.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나사렛의 예수입니다. 영광의 주님입니다.

여 러분도 기억하다시피,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전까지 그는 예수를 일개 목수로 알았습니다. 그분에 대해서 전혀 깊이 고려해보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분을 조롱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멸시받은 예수가 영광의 주님이고, 복되고 거룩하신 삼위일체 중 제2위이신 분이라는 진리, 그리고 성부 하나님께서 그분을 보내셨기에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다는 진리를 다메섹 도상에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입니다.

그 것이 바로 성육신의 놀라운 메시지이며, 말 그대로 유일한 희망입니다. 인간들의 노력과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이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요, 성육신의 경이입니다. 그분이 왜 마구간에서 태어나셔야 했습니까? "이는 사관에 방이 없었음이라." 돈을 가진 사람들이 여관방을 모두 예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막 아이를 낳으려는 불쌍한 임산부에게 방을 내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당 시 사람들도 현대인들처럼 이기적이었습니다. 새치기를 하면서까지 앞에 서려고 하고 자기의 권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만 괜찮으면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아기는 볏짚과 천한 짐승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들은 그 작고 힘없는 아기를 구유로 몰아버린 것입니다. 그 아기가 누구입니까? 바로 영광의 구주이십니다.



육체에 숨겨진 하나님을 보라!

큰 소리로 환호하며 맞이하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바 울이 전했던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구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보내시기 전에 위대한 선지자들과 종들을 끊임없이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실패했습니다.

하 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은 하나님의 독생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광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분이 행한 기적으로 증명되었습니다. 또한 그분의 삶과 가르침과 완전한 본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마귀와 모든 악한 것들을 정복하신 능력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폭풍과 격노한 바다를 잠잠케 하신 권능을 통해 입증되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창조주이십니다. 결정적으로 그분이 죽음의 사슬을 끊으시고 무덤에서 일어나서 승리를 거두신 그 사건, 즉 부활을 통해 입증하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 러분은 그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음을, 독생자로 세상에 오셨음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죄 있는 육신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에 관해 말하라구요? 아니요, 그럴수 없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할 수 있기에 그들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주님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사람에 대해 말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유입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바로 핵심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터무니없는 소리였습니다.



기 적은 좋은 것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연약함 가운데서 죽으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땅에 내려오셔서 그분을 구하시지 않았을까요? 그분은 불명예스러운 죽음, 수치스러운 죽음을 맞으셨으며, 사람들은 그분을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왜 그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을 강조합니까? 사도는 우리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 그리고 이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괴로움은 우리가 외인이고 반역자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 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서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를 없애지 못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영원이라는 시간을 들인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나의 수고로는

율법의 요구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의 열심도 심판을 유예시킬 수 없고,

눈물을 한없이 흘린다 해도

모든 죄를 보상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당신만이 나를 구원하셔야 합니다.

오직 당신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 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죄를 못 본 척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죄를 짓는 자마다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현시대에서도 증명되고 있습니다.



그 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까? 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처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의로운 성품 때문에 말입니다. 그분이 제가 저지른 죄로 인해 저를 벌하신다면, 저는 끝장나고 말 것입니다. 영원한 죽음에 빠질 것입니다.

하 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위해 한 가지 길을 계획하셨습니다.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기 전부터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흠 없고, 순결하시고, 순수하시고, 결코 율법의 일점일획도 범하지 않으신 분,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하신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십자가에 넘기셨고, 그분에게 우리의 죄를 지우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삼으신 것은 그 안에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특별히 저 십자가 위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5:19)



베드로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하 나님과 화목하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우리를 대신해서 벌을 받으셨으며, 우리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 것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것만을 전했습니다. 그 외에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보았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이 구원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바 울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도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고 말합니다(고전2:9).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입니다. 왜냐구요? 그것이 이룬 것, 그리고 우리에게 준 것들 때문입니다.

그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나요? 모든 죄가 사해졌다는 진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깨끗해졌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는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당연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모두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 떻게 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잇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 유일한 대답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해서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5:1).

우리의 죄가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일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지 없을지 걱정할 필요 없이 평안히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사 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양심의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직 한가지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집에 가서 마음을 고쳐먹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애쓰라고 권면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절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 나오라! 돈 없이 값없이 나아오라.' 이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그리스도께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그 래서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 우리 안에 평강이 임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새로운 삶이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기쁨을 알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빼앗길 수 없는 기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에 기록된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주에도 즐거워하나니"



모든 것이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절망이 우리를 흔들어도,

하나의 문이 열려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귀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영 광스러운 광경이 장차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옛 세상은 심각한 문제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의 문제는 점점 더 악화될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딤후3:13).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마24:6). 기독교는 이 세상을 완전한 세상으로, 전쟁이 없는 세상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본주의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한 비극은 점점 증가하며 모든 일들은 고통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일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미래의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영광의 구주를 이 세상에 다시 보내실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구름을 타고 오실 것입니다. '이기고 또 이기시려' 오실 것입니다.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모든 죄와 악과 더러움은 불못에 던져질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메시지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정결케 하시고, 의에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삶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영광이 임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3)

바 로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해도, 이 옛 세상이 무슨 짓을 저지른다 해도, 폭탄을 투하한다 해도, 난리가 난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바 로 이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하게된 이유 말입니다. 그는 이 복되신 분을 알았습니다. 그분의 은혜의 부요함을 받아 누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것들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만이 해결책입니다. 그것만이 능력입니다.

그 는 바리새인이자 자기 의와 자기 만족에 빠져 있던 사람, 그리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눈이 그분을 보고 그분을 믿는 자들이 그분과 같이 변화될 영광의 날을 바라보고 고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까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살 것이며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바 울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결단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전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만이 그의 삶 속에서 역사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인해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그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확신하고 고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바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6장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불 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6:9-11)

고 린도 교회 성도들은 고린도 항구에서 허드렛일을하는 일꾼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철학이 설파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술에 절어 있었고, 갖가지 죄들에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잇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철학, 정치, 사회학, 교육, 그 어느 것 하나 그들을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은 과거의 모습일 뿐입니다. 더 이상은 그렇지 않습니다.이미 깨끗하게 씻어졌기 때문입니다.



능력, 능력, 놀랍게 역사하는 능력

어린 양의 귀한 보혈 속에 그 능력이 있습니다.



성령과 능력의 증거 가운데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그들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들을 새롭게 했으며, 하나님 교회를 구성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저는 다음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바울에게만,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만 역사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 이 곳 애버라본의 샌드필즈에 있는 이 교회에서도 역사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저 는 여러분에게 그 사람들의 이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그들의이름을 들은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윌리엄 토마스(William Thomas), 혹은 시장 바닥의 빌리(Billy), 또는 빌리 스테포드샤이어(Billy Staffordshire)라는 사람의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잇는지요? 그는 77세까지 알코올 중독, 폭력, 방탕으로 얼룩진 소망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바로 이 건물에서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깨끗함을 받았고 거룩해졌으며 의롭다 하심을 입었습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리스씨(Mr. E.T.Rees)와 저는 이 자리에서 그가 천사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이 세상에서 영원의 세계로 떠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긴 것입니다. 다른 어느 것도 그를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그를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그 는 단지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몇 시간이라도 부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는 한결같이 소망이 없던 사람들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믿고 나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영원한 영광 중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입니다.



형 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이 전부입니까? 이것은 각 개인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분이 중심입니까? 다른 모든 것보다 그분이 먼저입니까? 그분이 전부입니까? 그분만을 믿습니까? 그분 외에 다른 것은 역사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분만이 역사하십니다. 저는 그것을 증명할 수 있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을 본 그 날 이후로

구속의 사랑이 내 노래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내 숨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6:14)



사 랑하는 여러분, 삶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죽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행복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여러분은 미래를 어떻게 맞이하겠습니까? 두렵습니까? 무섭습니까? 여러분은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겠습니까?

우 리는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50년 전에 이 곳에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 이 세상을 떠났지요. 우리도 지금 옮겨지고 있는 중입니다. 우리에게는 영구한 도성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여러분은 온전히 그분, 즉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주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에 모든 것이 고정되어 있습니까?

사 랑하는 여러분, 다른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 지역은 제가 여기 처음 왔을 때보다 더 많이 변했습니다. 이곳에는 한 주에 몇 푼 안되는 돈을 벌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그들은 모두 영광 가운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때 이곳에 없던 많은 것들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종말이 찾아옵니다. 여러분은 죽을 때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갈지라"(욥2:21)

최 후를 맞이할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시렵니까? 여러분은 그 어떤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말고는 붙잡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면 여러분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오, 그리스도여!

주님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발견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할 때 찾을 수 있는 풍성한 은혜

그 은혜가 나의 모든 죄를 덮습니다.

치료의샘물이 넘쳐 흐르게 해주소서.

나를 정결하게 하시고 지켜주소서.



예 수 그리스도와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여러분은 그분을 아십니까? 그분을 믿으십니까? 삶과 죽음, 그리고 영원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도우시는 분은바로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고 계십니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지금 이 시간에 분명히 깨달으십시오. 그분의 발 앞에 엎드리십시오.그분이 여러분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을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하실 것이고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이고,여러분은 거룩한 성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영광 중에서 주님의 얼굴의 광채를 받고 있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의 무리를 뒤따르게 될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복음의 진리를 깨달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