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적 싫증과 권태
습관적 싫증과 권태는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가 있기 전부터 인간 영혼 속에 있었던 증상입니다. 죄 짓고 난 이후 영혼이 느끼는 싫증과 권태가 반복된다면 이것은 계속적으로 죄에 빠져 허우적 거리게 만듭니다. 오늘은 이런 상황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살펴 보겠습니다.
싫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싫증이란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지 않지만 '싫다', '싫어한다'라는 말이 많습니다. 히브리어나 희랍어에서 많은 단어들이 쓰이는데 적극적으로 혐오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영혼의 싫증은 영혼의 권태감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신앙 생활 하다 느끼는 권태감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영혼의 싫증이란 신앙의 열렬함이 사라지면서 느끼는 피곤한 권태감입니다. 그런데 싫증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반감으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열렬함을 잃은 신자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감정으로 나가는 것이 싫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격의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 생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열렬함이 있다가 반감이 생기기 전에 먼저 권태감을 느끼는 싫증의 시기가 반드시 있습니다. 범죄하고 일단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꺽고 부드러운 마음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싫증까지 왔을 때 속히 다시 열렬함을 회복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해 피로감을 느끼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할 때까지 놔두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삶을 사는 비결은 일체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입니다. 여기서 성실함이란 내면의 경향성입니다. 자기 맡은 것에 대해 정확하게 해내는 기질을 경향성, 지향성이라고 합니다. 그런 마음의 지향성들은 영혼의 싷증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성실하던 마음의 경향성들을 잃게 됩니다. 부지런함은 부과된 의무를 시행하는 방식입니다. 이것은 게으른 육체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영혼에는 싫증이 질병이고 육체에는 게으름이 병인데 이것이 마음에서 만나게 됩니다. 잠 많이 자고 회개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게으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삶에서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밤 늦게 까지 철야 기도한 것도 아닌데, 실컷 자다가 그 다음날 낮에 일어났다 칩시다. 그때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찬송이 나올 수 있을까요? 육체의 게으름은 집요합니다. 특히 육신에 만성적인 연약함이 있는 경우에는 안일하게 살아가야 하는 생각이 어떻게 뒤섞여 있는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 게으름과 싸워야 하는데, 영혼의 싫증은 이런 육신의 게으름보다 더 위중한 것입니다. 은혜 받았다고 갑자기 부지런해질까요? 안 그렇습니다. 육체가 아직 게으르고 영혼은 열렬하면 육체를 쳐서 복종시킵니다. 게으른 사람도 은혜 받으면 새벽기도 나옵니다. 그러나 영혼이 열렬함이 없으면 육체를 이끌지 못하고 육체에 이끌려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시 영혼의 싫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해 보겠습니다.
부부간에 권태기가 오자마다 죽을래 살래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증오기는 권태기 다음에 오는 것입니다. 적대하는 감정 전에 상대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마음부터 생깁니다. 그게 싫증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한 것에 대한 권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거기에는 근본적 원인과 실제적 원인이 있습니다.
1) 싫증을 느끼는 근본적 원인
타락한 죄인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하나님에 대한 감각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모두 죄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죄를 따라 살려고 하는 강력한 경향성들이 자신도 모르게 생기게 된 것입니다. 부패성 안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면서 죄를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진실한 신자 안에도 죄가 있고 극악무도한 사람 안에도 죄가 있습니다. 이를 더 사랑하거나 저를 더 경히 여기게 되어 있기에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은혜가 우리를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죄가 영향을 못 미치느냐, 아니면 죄가 장성하여 은혜가 못 미치거나 하는 상태에 우리는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는 죄성과 같이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반감,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들어도 쉽게 싫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부패성이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부패성 때문에 인간 자체의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싫증이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전에도 싫증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천사의 타락을 들 수 있습니다. 천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 완전하십니다. 한 우두머리 천사가 타락해서 사탄이 됐습니다. 마귀, 사탄을 항상 단수로 사용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밑이 귀신들이 있습니다. 인간보다 더 완전한 천사들도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싫증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또한 아담과 하와의 경우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자리에 싫증이 생겼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자리를 가서라도 자기만족을 얻고자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싫증의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 싫증이 없으십니다. 이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라는 말과 관련됩니다. 무관심하고 냉정하신 하나님은 없고, 진노, 관심, 온갖 정서로 충만하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2) 영적 싫증을 느끼는 실제적 원인
첫째,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산불이 나면 옛날에는 맞불을 놓았습니다. 바람을 등지고 맞불을 놓으면 불을 끄게 됩니다. 영혼의 싫증이 하나의 불이라고 하면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면서 번져온다. 그 영향력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선한 일, 선한 의무로 강력하게 맞대응해야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 가는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요? 목표가 없으면 싫증이 번져올 때 견딜 수 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면 선한 의무를 가지고 맞대응함으로 견딜 수 있습니다. 그냥 하루 하루 살면서 어떤 선한 의무를 향한 추구점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강렬한 회개를 했었도 싫증에 넘어가게 됩니다. 은혜 받으면 뭐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불타오르는 추구점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를 위해 몸 받쳐 죽으셨나요? 이 사랑을 늘 생각하고 선한 의무를 실천하는 그런 사람들 안에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보존되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질병에 가까와집니다. 신자는 은혜에서 멀어질수록 싫증에 가깝게 됩니다. 신앙인의 관심은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곳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강력한 푯대가 있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도 살 수 있는 추구점이 있는가, 창조할 때의 원래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순전한 기독인이 되려 하는가, 모양이 그리스도인 아닌가, 내가 만나는 사람이 좋아 내가 참된 그리스도인인 것을 감추는가, 참 예수님을 닮고 있는가, 나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분을 쫓으려는 각오로 사는가, 그래서 모든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을 배신하지 않고 있는가, 늘 나의 내면을 살펴야 합니다. 이것 중 하나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면 나도 모르는 새 영적 싫증에 빠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발 돌이키십시오. 제발 다시는 또 동일한 죄로 넘어지지 마십시오.
세째, 마음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영적 수준에 올라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서서히 식어지곤 합니다. 권태기가 언제부터 온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모든 것들에 대해 권태를 느끼기 시작할 때 마음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생기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예민한가요? 상대방이 내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마찬가지로 마음 속에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들이 식는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것들을 예민하게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덫에 계속 걸려 넘어갑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침노를 당하는데 망루에 서서 지켜보지 않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벽이든 밤이든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저희 교회는 9/10 기도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침 9시이든 10시이든, 저녁 9시이든 10시이든 규칙적인 기도 시간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욕으로 향하던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일이 중요합니다. 정욕에 사로잡히면 내 마음의 동요가 거세게 일어납니다. 그때 나도 모르는새 나의 정욕을 합리화 시키고 그러다가 또 모르는 사이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규칙적인 기도를 통해 "주님 도와 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 꼭 필요할 때 올리는 즉각적인 기도도 강력한 효력이 있습니다.
네째, 범죄하기 때문입니다. 범죄하면 싫증이 가속화됩니다. 우리는 깊이 회개하였을 때 마음이 뜨겁지 않았나요? "맞아, 어떻게 받은 구원인데, 주님이 구원해 주시지 않았다면 어떤 희망도 없는 존재인데, 십자가의 보혈 없으면 어떻게 내가 살았을까? 그 주님이 계신데 어떻게 내가 이럴 수 있는가? 죄짓고 내가 또 얼마나 침륜에 빠져서 괴로와 하려고 이러는가?" 이런 다짐과 함께 범죄를 끊어버려야지만 더 온전한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 생활을 회복해야지만 죄에 대한 생각과 사고들이 바뀌게 됩니다. 나 혼자서는 안됩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셔야 죄를 멀리 밀쳐버리고 싶어 하게 됩니다. 영혼이 열렬해지는 사람이 싫증을 느끼는 것은 쉽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육체로 망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범죄의 자리에서 돌이키십시오. 죄 짓고 난 이후의 아픔을 기억하십시오. 제발!
그렇다면 이제는 우리가 느끼는 영적 싫증의 대상이 무엇인지 살펴 보겠습니다.
1) 하나님 자신에 대한 권태감-
신자가 하나님을 향해 반감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이기 때문입니다. 느끼지 못해서 그렇지 권태기를 거쳐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은혜를 너무 많이 받으면 기쁘죠? 왜? 하나님 자신 때문에 기뻐하게 되거든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존재 때문에 기뻐하게 됩니다."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2)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권태감-
관계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 남편, 내 애인을 신경 쓰기 싫어하면서 말합니다. "나도 추스르기가 힘든데..." 이것은 관계에 대해서 싫증이 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짜증이 납니까? 열렬한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사랑이 열렬할 때는 관계가 유지되지만, 그 관계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항항 정해진 시기에 권태를 느낍니다. 이른바 습관성 권태, 아무리 상대를 바꾸어도 평생토록 권태를 느끼는 사람들은 불행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권태를 느낄 때 대상을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라 관계 회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싫증을 느낄 때, 다른 대상, 세상의 것들로 열정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3) 의무의 권태감-
죄를 죽이고 주님께로부터 받는 사랑, 은혜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살지만, 권태감이 오면 의무의 고통만 생각 나게 됩니다. 연인들이 사랑할 때는 희생하면서 하나되는 것을 느끼고, 어떤 시련이 오더라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권태감이 있을 때는 고난이 오면 더 멀어지는 계기가 됩니다. 싫증을 느끼면서 반드시 해야할 의무를 끊어버리게 되면서 우리는 의무에 대한 권태감이 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럴 경우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도 불가능하고, 성화의 진전도 불가능합니다.
4)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태감-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 사랑, 음성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권태감이 오면 하나님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고 항상 뭘 하라고만 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사람이 좋으면 목소리도 좋고 사람이 싫으면 목소리도 듣기 싫습니다. 목소리는 존재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영향 받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기게 되면,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자리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어떤 범죄가 드러나야 그때가서 내가 미끄러졌음을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그렇게 미끄러지려하는 길목에서 우리 스스로를 막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싫증입니다. 제발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고 이런 권태에 있는지 살펴서 범죄의 자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