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권태감에 빠지는 상황
영혼의 싫증은 신자의 마음에 영향을 줍니다. 이런 영혼의 싫증 상태는 마음에 전달되면서 지성, 감성, 의지가 영향을 받게 되고 곧 행동을 착수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죄가 우리 마음 밭에 뿌려져서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하루 10만 가지 생각이 뿌려진다고 합니다. 이 생각 중 받아들이고 뿌리를 내리면서 죄된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악은 밖으로 나오면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싫증과 함께 생각 속에 허용했던 다양한 정보에 대해서 제일 먼저 주도권은 지성이 갖습니다. 생각 속에 떠오를 때 죄를 짓겠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만 떠오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착상되면 주도권을 감정이 가지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감정이 출산하기까지 그것을 성장시키게 됩니다. 상상 속에 했던 범죄를 실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지가 "안돼!" 하면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지성, 감성, 의지를 통제 하는 것은 영혼이 싫증이 없는 상태에서 가능합니다. 싫증이 일어나면 생각은 부주의하게 됩니다. 아무렇게나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이 있으면 생각이 태만하지 않고,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데...”라고 하면서 죄된 생각을 잠시라도, 조금이라도 허용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싫증이 있으면 상상 속에 자연스럽게 죄가 들어와서 자연스럽게 돌아다닙니다. 싫증이 생기면 죄를 미워하지 않고 태도가 애매모호합니다. 이런 사람은 정서가 감염되어 병들기 시작하는 상태이며, 죄와 가까워지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진 상태입니다.
"영으로 육신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영혼이 싫증 상태에 있는데, 나의 지성은 부주의하고, 감성은 죄를 사랑하고 있고, 의지는 휴업상태에 있다면, 죄가 들어와서 자리만 잡으면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어떻게 이런 죄를 졌을까? 왜 멍청하게 바보같이 엄청난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후회할까?"라고 가슴을 칩니다. 파고 들어가면 영혼 속에 일어나는 싫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상태를 면밀하게 살펴야 한다.
영혼의 싫증은 지정의를 혼란시키고 죄에 대해서 친화적이게 만들어서 마음을 죄에 빼앗기게 합니다. 죄를 깊이 심게끔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싫증에 대해 가슴 아파하며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키우게 하는 것입니다.
싫증의 영향력은 가히 총체적입니다. 영혼 안에 일어난 싫증이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강건함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싫증은 태만을 유발하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부주의하게 되고, 감성은 죄를 좋아하고, 의지는 죄와 싸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싫증이 태만한 신앙생활을 유도합니다. 싫증의 종착역은 하나님을 향한 반감으로 데려가기를 원합니다. 영혼의 싫증이 생기고 나서야 하나님을 향해 반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싫증을 퇴치하는 것이야 말로 영적 성장의 비결이 됩니다. 싫증은 타락한 정서의 대표적 요소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옛날 좋아하던 가요들이 다 싫어집니다.
영혼의 싫증은 우리 안에 있어서 갑자기 발전하거나 오래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일정한 환경 속에서는 싫증이 촉진됩니다. 어떤 경우에 그렇게 될까요?
1) 육체가 게으를 때 영혼의 싫증이 촉진된다.
싫증은 조금 느끼는데, 육체가 부지런하면 그래도 죄에 빠지는 속도가 느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육체가 게으른 사람들은 말씀과 기도생활을 아예 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잠이 적고 아침에 잠이 깼는데 할 일이 없어서 그나마 성경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 주위에 보면 영혼이 침체에 빠졌는데도 교회 계속 나오는 사람들 있습니다. 육체가 부지런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는 영혼의 싫증이 누룩처럼 번져가지는 못합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니까 은혜를 받게 됩니다. 어느 한계에 와서 육체가 피곤을 느끼면 게을러지게 됩니다. 싫증을 느껴도 영혼의 호소가 있으면 급속도록 번지게 되지는 않습니다.
싫증이 난 상태에서 육체가 피곤해지면 카드를 내밀게 됩니다. 휴식이라는 카드를 내밉니다. 영혼이 열렬함이 있으면 "이 자식이~" 하고 일어납니다. 하지만 싫증이 있는 상태라 곧 휴식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미끄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존오웬 목사님은 우리의 육체는 신령한 육체와 본성적 육체로 나뉜다고 했습니다. 본성적 육체는 죄된 육체, 신령한 육체는 감화된 육체입니다. 이 두 육체가 서로 싸워야 하는데, 서로 타협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사람은 분투하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가?" 고민하지 않고 항상 변명과 핑계를 댑니다.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것은 자신의 태만에 대해 너무 많은 핑계를 대고 조금만 좋은 일 해도 자부심을 느끼게 됩니다. 신령한 육체와 죄된 육체에 신령한 싸움이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는 것입니다.
2) 유혹이 빈번할 때 영적 싫증이 촉진된다.
유혹은 객관적인 게 아닙니다. 객관적이면 유혹이 아닙니다. 유혹은 항상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유혹이 반복되는 가운데 누를 수 없는 욕망으로 가속화되는 것입니다. 유혹이 반복해서 자극하면 정욕은 분발하게 되고 지정의에 영향을 미칩니다. 악한 사람은 "자신이 쌓은 악에서 악을 내는 것"입니다. 인박이는 것입니다. "첫 술잔은 사람이 택하고, 그 술을 먹고 나면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합니다. 정욕이 영혼에 싫증난 상태에서 역사하면서 하는 중요한 역할은 아름다운 마음의 틀들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소되면 반듯하게 사물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계속된 유혹의 상태에 자신을 방치하면 마음의 아름다운 틀들이 변형됩니다. 마음의 틀들을 허물어집니다. 마음 전체의 틀이 파괴되면 사람은 자신의 마음의 틀과 동일한 환경을 좋아하게 됩니다. 차이가 난 환경은 싫어하게 됩니다. 점점 하나님 없는 마음들과 어울리는 게 좋고 또 그것을 합리화시킵니다. 사단의 유혹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배드리기 싫어하는 마음의 틀로 바뀐 것입니다. 이때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어려운 고비를 뚫고 회개하고 나면 마음이 새로워져서 자신의 영혼의 모습이 어떤지 알게 되고 불순종하며 살 수 없다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유혹에 방치된 마음을 바로 잡으십시오.
3)염려로 마음을 빼앗기는 환경이 될 때 싫증이 생깁니다.
염려는 마음이 분산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집중하지 못하게 됩니다. 분산된 마음이 되면 하나님을 열렬히 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고뇌하지 않게 됩니다. 나뉜 마음을 가지고는 열렬함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한 순간에 마음의 열렬함이 사라지고 우리의 육체는 본성적 육체를 지원하는 셈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염려와 생명에 이르는 염려가 있습니다. 열렬함에 불을 붙이는 염려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 제가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이런 근심이 있을 때는 마음이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근심과 염려는 마음을 나뉘게 합니다. 세상 염려가 생기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전부 알고 계획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4)죄책감을 상실할 때 싫증이 촉진됩니다.
싫증을 간직하고 살아가면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되고 신앙생활하더라도 차가운 삶을 살게 됩니다. 싫증을 간직하면서 마지못해서 신앙생활하면 미지근한 생활,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진실한 신앙생활은 자신이 진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신자가 되고 있어햐 합니다. 싫증이 생기면게으르고 나태하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혹시라도 이런 가책이 있으면 끊임없이 투쟁하게 됩니다. 가책이 없으면 투쟁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영혼의 싫증이 있으면 죄책감도 상실합니다. 자신의 양심이 "너 죄짓고 있다."는 찔림을 느끼고 가책을 느껴야 합니다. 그런 신앙생활하는 자는 광신자라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렇게까지 믿음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너는 그렇게 살 사람 아니다."라고 주변의 친한 사람들이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 따라 가지 마십시오. 넓을 길로 가지 마십시오.영혼의 싫증을 허용하면 결국은 배교적인 삶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회복하기 어려운 그릇된 길로 빠지게 됩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향해서 싫증을 가질 이유가 무엇인가요? 믿음의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새로운 은혜를 보면서 감격 했습니다. 나라가 망한 상태에서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고난 속에 더 깊이 빠져 있으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격리된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고난을 이겨나갔습니다. 그 때마다 열렬한 마음 가지고 사랑하신 예수님, 그 피 묻은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핍박을 이겼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 사실 때 싫증으로 가득찬 모습이었나요? 십자가 지신 상태에서도 예수님은 한편 강도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열렬한 생애, 불꽃처럼 타오르는 생애, 어떤 피곤함이나 나약함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뜨거운 불이 붙습니다.
도대체 냉담하고 싫증으로 가득찬 마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같은 그런 열렬함이 있습니까? 그런 열렬함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찢고 있습니까? 물질이나 구걸하고 출세, 사업이나 잘 되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 아닙니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세상이 불붙는 것입니다. 핏빛 열정을 가지고 십자가에서 산화하신 것처럼 열렬함 마음으로 영혼의 싫증을 죽이고 우리들 모두가 열렬하게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한 해만이라도 살 수 있다면 백년을 한 나라의 제왕으로 사는 것보다 낫습니다.
영혼의 싫증은 버리고 열렬함으로 사는 진실한 신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