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권태의 파괴력
영적 권태의 파괴력
1)은혜의 마음을 파괴한다.
싫증은 즉각적으로 저지른 범죄는 아니지만 대부분 죄라고 하는 의식이 없습니다. 영적 게으름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집니다. 그런 죄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피부에 상처난 것은 치명적인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식습관 같은 게 잘못된 것은 질병의 요인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누적됩니다. 그런 것은 암으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죄는 가책을 느끼고 그것 때문에 열렬하게 회개합니다. 하지만 영혼의 싫증 같은 것은 눈물 흘리면서 회개하지 않습니다. 암 세포처럼 예방약 없이 번져갑니다. 나중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으로 발전하고 죄가 산출될 때 가서야 어디서 떨어졌는지 생각하고 나서야 알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영적 싫증이 생기기 전 우리가 은혜를 받았을 때는 마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은혜 받고 나면 우리 마음에 틀이 형성됩니다. 은혜 아래 있을 때와 죄 아래 있을 때의 틀이 다르게 됩니다. 싫증이 마음에 은밀하게 침투해서 공격을 하면서 마음의 틀을 허물어 버립니다. 우리 마음은 미세하게 균열이 생기면서 무너지다가 어느 한순간 와르르 무너집니다. 이런 은혜의 마음을 파괴하는 것은 싫증이 주도하는 것입니다. 싫증이 생기면 마음에 바이러스처럼 찾아가서 마음이 실려야 하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신앙생활, 즉 말씀 묵상, 기도, 예배, 찬양, 성경공부하는데 모두 우리의 마음이 실립니다. 싫증의 바이러스가 들어가서 역사하면 그 사람은 정직한 말씀의 선포가 있을 때, 몸부림치는 회개가 있을 때 신경과민으로 느껴집니다. 부담스럽고 괜히 싫고 광신자 같이 느껴집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왜 이렇게 많이 잘까? 왜 이렇게 절제가 없을까?" 항상 고민하면서 살았습니다. 이것을 '신경쇠약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싫증이 은혜의 마음을 공격하면, 마음의 틀이 헝클어집니다. 은혜 받은 사람의 마음의 경향성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2)기도의 실천을 파괴한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은 마음이 뒤따라가야 합니다. 마음이 따라가지 않으면 티가 납니다. 기도는 즉시 표가 납니다. 영혼의 열렬함이 있을 때 기도가 열렬해집니다. 하지만 영혼의 싫증이 있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영혼의 싫증은 육체가 떨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암 걸린 사람이 연고 바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때는 영혼의 뜨거움을 간직했을 때입니다. 싫증낼 때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열렬함을 간직하면 기도가 환경을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너무 바빠서 기도 못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기도의 은혜가 차면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기도하게 되고 버스 타고서도 기도하게 됩니다. 생애적으로 주님 만나고 열렬하게 기도하던 때가 내 생애 가장 바쁘던 때였습니다. 가장 열렬한 기도의 영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그때 아무데서나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라는 것은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열렬함이 사라지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열렬함이 가득 차야 기도가 쫙 나옵니다.
3)말씀의 미각을 파괴한다
말씀의 미각을 싫증이 앗아가게 만듭니다. 그 모든 싫증 중에 가장 큰 싫증이 복음/교리에 대한 싫증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대표로 죽으시고 3일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걸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죄인인 나를 대신한 죽음, 우리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덕을 보게 되었다는 것, 이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구원을 믿게 되었는데 이것에 싫증이 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싫증난 사람들은 관심사가 온통 실제적인 것, 복음을 토대로 실제적인 것은 좋지만, 그렇지 않으면 공허하게 울려퍼질 소리가 됩니다. 합리주의가 퍼지면서 교회가 쇠퇴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아니래?" "실제적인 것 해보라"고 합니다. "다 아는 얘기 하지 말고 실제적인 얘기하라"고 합니다. 실제 생활에 대한 욕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실제 삶에 적응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지적 동의만 하게 됩니다. 설교단이 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문을 닫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싫증은 하나님의 구원방법과 사람관계를 회복시키는 복음에 대한 반감을 일으키게 됩니다. 구원하는 방법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교리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역사적으로 쓰여지는 것을 한번에 이해하도록 합니다. 성경의 내용을 샅샅이 몰라도 성경 전체를 아는 안목을 줍니다. 성경 한절 한절도 알아야 하고, 교리적으로 전체도 알아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은 상태의 기도가 참 미신적이고, 맹목적입니다. 싫증이 생기면 말씀에 대해서 "뭐가 이렇게 복잡해, 간단하게 말해주지..."라고 불평합니다. 하지만 싫증이 없으면 더 많이 깨닫고 더 많이 알려고 합니다.
4) 은혜의 능력을 파괴하게 된다
은혜가 생기면 할 수 없던 일들을 합니다. 체력이 없으면 정교한 기술이 나올 수 없습니다. 체력이 있어야 에너지 비축되어 있기 때문에 최선을 선택하지만, 체력이 약하면 에너지가 적게 드는 것을 선택합니다. 조그만 공하나를 사용하는데도 체력이 있어야 합니다. 죄와 싸우는데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다 알겠는데, 그대로 할 힘이 없습니다. 죄가 들어왔는데 죽이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영혼의 싫증이 역사하면서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능력을 파괴해서 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는 것을 빼앗아간 상태입니다. 죄의 지배 속으로 상당히 끌어간 것입니다. 싫증은 태만과 부주의를 만듭니다. 힘들지 않게 살려고 하면서 세상 쾌락에 대한 분발력을 키우게 됩니다. 싫증난 영혼은 대충 대충하는 신앙생활만 하게 만듭니다. 꼼꼼함, 주의깊음, 심사숙고 등으로 살지 않게 만듭니다. 잠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이 극대화된 상태입니다. 이쯤대면 정말 위험합니다. 싫증에 대해 즉시 즉시 반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게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5) 개혁의 의지를 파괴하게 된다
신자에게는 끊임없이 자기 검증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할 때 자기를 파악하는 기능이 있어야지만 됩니다. 철저한 삶을 살기 싫어합니다. 온전해 지려고 하는 것은 뭔가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것 아닙니다. 영혼이 싫증으로 가득차면 "지금 너는 잘못 사는 것"이라는 말에 승복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분발해야 할 의욕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개선을 하기 위해선 분발, 그것을 위해서 희생과 수고가 필요한데, 더 온전해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싫증으로 그런 마음이 사라지면 아주 비효율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냅 둬, 나 이대로 살다 죽을거야," 이것은 창조의 목적을 이탈한 대표적인 삶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있으려고 합니다. "나는 내 멋대로 하고 회개할거야"라고 생각하지만 나중에 가서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가혹할 정도로 긴터널을 지나야 합니다. 이런 죄는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게 모두 다 영혼의 싫증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수고와 고통이 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신의 삶은 흐뜨러집니다. 반감이 죄를 잉태하고 죄를 산출하게 만듭니다. 싫증은 죄가 우리에게 보내는 특공대입니다. 바이러스처럼 퍼뜨려서 반감을 지니게 만들고 죄의 산출로 이끌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요? 들포도만 맺는 우리들, 영혼의 싫증을 간직한 우리, 그런 우리에게 극상품 포도를 맺기 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당장 영혼의 싫증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돌이켜 보십시오. 고난이 올 때 아픈 것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우리 영혼이 싫증에 가득찰 때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열렬함이 있으면 언제나 행복했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고, 찬송을 부르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가 인생 최대의 행복을 느낄 때였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싫증을 미워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