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적 호기심으로 인한 신자의 부패

성경의 진리는 실천을 통해 체득되지 않고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이 지속될 때 은혜의 상태에서 부패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을 지적 호기심의 대상 정도로만 생각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죄 자체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으면 절대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마음 속에 있는 죄는 신자가 죄에게 순종하지 않고 죄를 공격할 때를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머리에 있는 진리를 가슴에 끌어내리지 못함으로 실천적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이 하는 역할입니다. 말씀을 듣고 은혜 안에 있으면 계속 말씀에 대한 욕구가 생깁니다. 그러나 은혜가 사라지면서 말씀에 대한 무관심이 생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더라도 어떤 이유로 말씀을 갈망하는지 점검하지 않으면 자신이 부패하고 있더라도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 두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싶은 갈망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단지 지적 호기심이고 또 하나는 말씀의 실천을 위한 갈망입니다. 똑같이 말씀을 그리워해도 하나는 지적 호기심 때문에, 또 하나는 믿음, 경건한 삶을 위해서 그렇게 됩니다. 1. 지적 호기심 지적 호기심으로 말씀을 개념적으로만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우리 영혼이 거룩해질수도 없고 경건한 삶을 살 수도 없습니다. 유럽에서는 사신신학, 즉 하나님 죽음의 신학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불신자이면서 신학자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은 우리와 다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들에게 죽은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게 합니까? 그게 바로 지적 호기심입니다. 신자는 지식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부러움이 대상이 되어야지 단지 박식한 사람만을 부러워해서는 안됩니다. 지적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은 게걸스럽게 지적 욕망을 채우지만 그것이 결국 우리 영혼을 부패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지적 호기심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게 되면, 우선 진리가 머리에만 머물고 마음까지는 내려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더이상 진리가 발전되지 않기 때문에 총명이 생기지 않습니다. 머리로 이해된 진리를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능력이 총명입니다. 참된 목자는 가슴에서 끌어내서 가리킵니다. 가짜는 머리에서 끌어내서 가리킵니다. 더 가짜는 머리를 열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적 호기심은 체험에서 얻어낸 지식이 아닙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소중하지만 그 특징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지식은 개념적으로 쌓이면 교만하게 합니다. 2. 경건한 삶의 실천 경험이라는 것은 한없는 서술을 가능하도록 하는 폭넓은 자원의 세계입니다. 우리는 실천을 통해 이런 경험을 얻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십자가 고백은 경험적 지식이었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목 박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체험한 사건을 고백한 것입니다. 재산, 처자식, 부귀 명예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택하고 갈 수 있는 경건의 삶을 실천하면서 굳어진 길이었습니다. 이런 경건의 삶은 우리의 마음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건한 삶을 실천하기 위한 진리는 어떤 것입니까? 우선 이 진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32절“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진리의 빛이 마음에 심겨질 때 마음이 성령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거룩하게 하고 삶으로 흘러나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을 줍니다. 그런데 이런 진리는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납니다. 성령의 은혜와 함께 깨닫게 되는 말씀을 통해 경험적 지식이 획득되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이 선포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속에 심겨져서 이렇게 살겠다고 결단하게 됩니다. 예배 전체가 진실한 경배의 현장이 됩니다. 은혜의 요람에서 태어나고 치열하게 분투하는 현장에서 자라가게 됩니다. 성화의 삶을 사는 자들은 성경의 이해가 빠르게 됩니다. 이 진리는 개념적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과 마음과 생각 속에 적용되어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지 않고는 죄들이 죽고 성화 될 수도 없습니다. 경험적 이해 과정을 통해 문자만으로 알 수 없는 놀라운 비밀을 터득하게 하고 우리를 견고하게 서서 죄와 싸우게 만드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수 없이 죄지은 자들을 용서한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적 호기심은 이 사실을 그저 아는 것으로만 그칩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내 안의 죄는 먹물 주머니가 떠지듯 내 영혼을 부패가 했습니다. 이것은 공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현상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지배력을 얻고 그 사람을 온갖 더러운 상황에 빠지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개념적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용서함 받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리 생각해도 맘 속의 죄는 공격 당하지 않습니다. 진리에 대한 책임있는 실천, 진리를 마음이 사용해서 분투해서 매일매일 살아가도록 내면의 역사를 움직이는 경험없이는 부패한 상태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경험적 이해는 이렇습니다. 어느 날 자신의 죄를 깨닫고 말씀에 있는 용서를 받고 싶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많은 사람들은 죄를 짓고 용서함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함 받고 싶다는 갈망이 생깁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습니다. 온갖 세상 것에 정신이 팔려 살았지만 내 옇노의 끔찍한 죄에 빠져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하늘이 열리고 은혜의 샘이 터지는 체험을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개를 하고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총명의 어두움이 사라지고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것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게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말씀을 굳게 붙들고 죄와 싸우겠습니다. 이 말씀을 제 삶에 적용해서 살겠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많은 지를 알게 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됩니다. 이게 경험적 이해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실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뼈저리게 경험되는 작용이 사라집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으려 하지만 성령은 그것을 실천하려는 사람, 즉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5장 32절에 따르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증거를 성령을 통해서 주십니다. 그래서 성령이 ‘양자의 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제각각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과 영혼을 돌보지 않으면 성령의 내재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결해지는 것만큼 성령은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합니까? 지적 호기심입니까? 아니면 경건한 삶을 살면서 성령님을 체험하기 위함입니까? 지적 호기심의 차원에서 나오십시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양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시기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