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한 자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
요한복음 20장19절~20절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1.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밀려온 것은 혼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치운 것일까?”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 믿었다고 되어 있는데, 부활을 믿었다기 보다는 시체가 사라짐을 믿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던 것 같습니다. 도마의 의심도 그래서 나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제자들은 이중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리였기에 박해가 있으리라는 두려움과 둘째는 사라진 시체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지니게 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려졌기에 로마 군인들이 무덤을 인봉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문들을 다 닫았습니다. 자신들이 숨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해도 입지 않으려는 극도의 불안, 초조, 두려움을 제자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 마땅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알아듣지도 못했고 누가 더 높은지 싸우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는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도 두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모여 있었지만 자신들의 갈길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어떤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문을 닫았지만 불안을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환영과 환상이 아니라, 실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체의 신비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부활체의 신비한 몸이기에 물리적 벽을 통과해서 제자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불안과 혼돈,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게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모든 것이 막혀 있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뚫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우리는 상식에 묶여 있어 능력의 몸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안과 절망과 혼돈에 둘러쌓여 있어도 주님이 찾아오시는 신비한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언제든지 찾아오실 수 있는 주님을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물리적인 계산과 상식으로는 주님 찾아오실 것 같지 않아도, 에워쌓인 벽, 닫힌 벽과 같은 상황에서 주님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시고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공생애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고, 육신 죽음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고, 부활 후 제자에게 주신 첫 말씀이 평강이 있으지어다입니다. 왜 평강이 없느냐는 책망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임한 평강을 축원하는 말씀입니다. 희랍어로는 “에이레네 휘민(peace to you)”인데, 히브리어로 이 에이레네는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샬롬의 왕으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온 이스라엘이 화목한 가운데 드리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안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찌그러지거나 깨지지 않는 온전한 상태가 샬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서 “텐니 샬롬” 하면, 그 빵을 통째로 달라는 의미입니다. 샬롬은 부족함이 없이 온전한 것을 유지한 상태인데, 이 샬롬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녕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안녕도 수없는 전쟁, 당쟁, 역모 등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임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안녕인 상태에 있길 원하십니다. 한 인간으로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정신, 영혼, 육체가 땅의 자원과 하늘 자원에 대해 결핍 없이 있는 상태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옵니다. 로마의 팍스는 로마의 군사력을 통한 것이었지만 성경의 샬롬은 하나님과의 샬롬 때문에 인간의 모든 관계가 샬롬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서로 샬롬을 유지하지 못할까요? 함께 사랑을 나누고 용서하고 구제하고 베풀어야 할 교회 지체들끼리 상처를 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샬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어떤 인간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살았지만 서로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이 부부 싸움했나요? 각자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지니까 그들의 관계도 깨진 것입니다. 부부간, 부자간 갈등은 서로 화해한다고 샬롬이 회복되는 것 아닙니다. 주님과의 샬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3. 주님의 손과 옆구리
예수님이 보여주신 상처를 통해 실제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두려움의 닫혀진 제자들의 은신처는 기쁨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등지는 순간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사람에게 어떤 기쁨이 있을까요? 기쁨이 있다면 세상이 주는 것이니, 잠시 그 기쁨 지나고 나면 더 큰 슬픔이 오게 됩니다. 은신처에 숨어 두려움과 공포, 절망 속에 있다면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1. 찾아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첫 번째로 제자들을 만나시는 장면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밀려온 것은 혼란과 두려움이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시체를 누가 치운 것일까?” 베드로가 무덤에 갔을 때 믿었다고 되어 있는데, 부활을 믿었다기 보다는 시체가 사라짐을 믿었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없던 것 같습니다. 도마의 의심도 그래서 나온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제자들은 이중적인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무리였기에 박해가 있으리라는 두려움과 둘째는 사라진 시체에 대한 책임을 자신들이 지니게 될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부활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려졌기에 로마 군인들이 무덤을 인봉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제자들은 문들을 다 닫았습니다. 자신들이 숨었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어떤 해도 입지 않으려는 극도의 불안, 초조, 두려움을 제자들을 경험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종교지도자들이나 유대인만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 마땅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그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알아듣지도 못했고 누가 더 높은지 싸우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는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다는 것도 두려웠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모여 있었지만 자신들의 갈길을 제시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던 베드로, 요한, 야고보도 어떤 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넘어졌을 때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려움 속에서 문을 닫았지만 불안을 막아주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 한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환영과 환상이 아니라, 실체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부활체의 신비입니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부활체의 신비한 몸이기에 물리적 벽을 통과해서 제자들 가운데 홀연히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불안과 혼돈, 두려움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게 됩니다. 물리적으로는 모든 것이 막혀 있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뚫고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이게 기적입니다. 우리는 상식에 묶여 있어 능력의 몸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예측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상황이 불안과 절망과 혼돈에 둘러쌓여 있어도 주님이 찾아오시는 신비한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언제든지 찾아오실 수 있는 주님을 우리는 기대해야 합니다. 물리적인 계산과 상식으로는 주님 찾아오실 것 같지 않아도, 에워쌓인 벽, 닫힌 벽과 같은 상황에서 주님은 모든 것을 뛰어넘어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평강이 있을지어다
부활하시고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공생애 첫 말씀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이고, 육신 죽음의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 였고, 부활 후 제자에게 주신 첫 말씀이 평강이 있으지어다입니다. 왜 평강이 없느냐는 책망의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임한 평강을 축원하는 말씀입니다. 희랍어로는 “에이레네 휘민(peace to you)”인데, 히브리어로 이 에이레네는 샬롬입니다.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아주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샬롬의 왕으로 오신 것이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온 이스라엘이 화목한 가운데 드리는 제사가 화목제입니다. 한국말로 번역하자면 “안녕”인 것입니다. 무엇인가 찌그러지거나 깨지지 않는 온전한 상태가 샬롬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서 “텐니 샬롬” 하면, 그 빵을 통째로 달라는 의미입니다. 샬롬은 부족함이 없이 온전한 것을 유지한 상태인데, 이 샬롬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안녕한 상태입니다. 우리나라의 안녕도 수없는 전쟁, 당쟁, 역모 등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상태임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안녕인 상태에 있길 원하십니다. 한 인간으로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정신, 영혼, 육체가 땅의 자원과 하늘 자원에 대해 결핍 없이 있는 상태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옵니다. 로마의 팍스는 로마의 군사력을 통한 것이었지만 성경의 샬롬은 하나님과의 샬롬 때문에 인간의 모든 관계가 샬롬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서로 샬롬을 유지하지 못할까요? 함께 사랑을 나누고 용서하고 구제하고 베풀어야 할 교회 지체들끼리 상처를 내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샬롬이 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어떤 인간도 서로 화목하지 못하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렇게 사랑의 고백을 하면서 살았지만 서로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둘이 부부 싸움했나요? 각자 하나님과의 샬롬이 깨지니까 그들의 관계도 깨진 것입니다. 부부간, 부자간 갈등은 서로 화해한다고 샬롬이 회복되는 것 아닙니다. 주님과의 샬롬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3. 주님의 손과 옆구리
예수님이 보여주신 상처를 통해 실제 부활의 몸으로 오신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두려움의 닫혀진 제자들의 은신처는 기쁨의 장소로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등지는 순간 기쁨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떠난 사람에게 어떤 기쁨이 있을까요? 기쁨이 있다면 세상이 주는 것이니, 잠시 그 기쁨 지나고 나면 더 큰 슬픔이 오게 됩니다. 은신처에 숨어 두려움과 공포, 절망 속에 있다면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