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죽여야 하는 이유 3가지
골로새서 3장 5-6절,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똑같은 나무라도 심어만 놔둔다고 좋은 열매 열리는 것 아닙니다. 대추나무는 계속 나무를 귀찮게 해야, 가지치기도 하고 거름도 주고 해야 열매가 좋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가만 놔두면 제대로 된 인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를 다듬어 주셔야 우리가 좋은 열매 맺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정원사들이 주로 하는 것이 전지가위를 가지고 가지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죄를 쳐내지 않으면 신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명령을 받는 자들은 바로 신자들입니다. 1절에 보면 분명히 “너희가~”라고 하면서 명령받는 자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것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죄를 지으면서 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상태인 것입니다. 바울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는데, 이 때 “복종”은 노예를 다스릴 때 쓰는 용어입니다. 즉 우리를 노예 다스리듯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됐다할지라도 며칠 사이에 죄를 짓고 신앙생활 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해서 신앙생화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진노로 작용합니다. 진노와 심판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가 살아있는 신자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매일 매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감동,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기도가 안되고, 은혜가 없고, 감동이 없으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지금 저는 살고 죽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할 때, 자신의 죄의 지체들을 죽이는 것을 말하고 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 철저하게 씨름했기에 죄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두려워합니다. 철저히 죄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싸워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죄가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언제 영접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언제 체험했습니까? 그런데 왜 신앙이 식었습니까? 앞의 두 가지는 거의 대답할 수 있지만, 대부분 신앙이 식은 이유를 말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의 착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보면 죄의 힘이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케이오 당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데도, 환희도 없고, 걱정투성이입니다. 내 안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 안에 죄와 야합하려는 본성을 보고 날마다 죽노라고 하고, 자신을 죄의 법 아래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유혹이 우리의 탐심과 결탁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 속에 일어나는 사악한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 해도 우리 속의 사악한 욕망을 죽이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유혹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탐심을 죽이기 위해 은혜라는 제초제를 뿌려야 합니다. 죄는 신자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할 때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요, 우리 속 깊은 곳에서 잠복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옛생활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의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은혜 받았다고,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우리는 계속 죄를 죽여야 합니다. 은혜 받아 산산이 부서진 사람도 그 속에 있는 죄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으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자기로부터 크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 울었으면 강철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먹으면서 매일매일 죄와 싸워야 합니다. 왕년에 은혜 받으면 뭐합니까? 바울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새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죄와 싸운 승리의 고백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죄를 죽이십시오.
2. 죄가 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안달을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죄의 기질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계속 죄짓도록 하는 것이 죄의 성품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개입합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기에 우리가 순결해야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고,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고 신령한 은혜 생활을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지적이 없으면 하나님을 모시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완전하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 속에 역사하여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람 앞에선 신앙에 대해 청산유수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벙어리가 됩니다.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신자가 사는 힘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때 생깁니다. 인간 자체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한순간도 살 수 있는 것,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순결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살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해야지만 우리는 한 호흡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이즈가 왜 무섭습니까? 그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몸의 면역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병균에 쉬게 감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스스로 이길 영적 면연력이 없이 죄에 끌려 다니는 존재입니다. 삼손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사사였던 그가 두 눈 뽑히고, 남의 나라에서 곡식 갈기 위해 연자 맷돌을 돌리는 짐승이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뭘 믿고 담대하게 자신감이 넘쳐 산단 말입니까? 매일매일 은혜 생활 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얼마나 주님의 참사랑을 쫓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죄를 날마다 죽이지 않으므로 핍절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죽이십시오.
3. 죄가 위대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작게 시작된 죄의 씨앗은 최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탐심은 여건만 허락되면 빼앗으려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이성에 대해 음심을 품으면 나중에 꿈꾸는 것은 범하려는 것입니다. 미움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그 결과가 두려워 억제 당하고 있지만 여건만 되면 상대를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심에 대해 의심이 드는 것도 그 최악의 목표는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죄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런 죄의 씨앗이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죄의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 저의 불결한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저도 정결하게 살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신자 속에서 죄의 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도 있기에 성령님 의지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죄는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살아나게 됩니다. 찬양이 쏟아집니다. 기도문이 열리게 됩니다. 눈물이 터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죄를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해야 죄가 끔쩍도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욕망을 그때 그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죄를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처참하고 끔찍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그런 것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제거하지 않고 놔두면 죄가 장성해져서 뽑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자라서 자신을 삼키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없으면 결국은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와의 싸움을 게을리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신도가 많거나 교회건물이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신자들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날마다 죽였습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쫓은 바울도 자신의 죄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더 열심히, 더 간절히 죄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고, 우리가 키우고 있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피흘린 것 아닙니까?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의 씨를 멸절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더러운 죄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해달라고, 죄의 소원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내 안에 있는 죄를 죽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지런히 은혜 생활해서 죄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내 안의 조는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만 살아 계시도록 간구하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똑같은 나무라도 심어만 놔둔다고 좋은 열매 열리는 것 아닙니다. 대추나무는 계속 나무를 귀찮게 해야, 가지치기도 하고 거름도 주고 해야 열매가 좋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가만 놔두면 제대로 된 인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를 다듬어 주셔야 우리가 좋은 열매 맺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정원사들이 주로 하는 것이 전지가위를 가지고 가지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도 죄를 쳐내지 않으면 신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명령을 받는 자들은 바로 신자들입니다. 1절에 보면 분명히 “너희가~”라고 하면서 명령받는 자들이 누구인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구원받은 것이 취소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도의 문이 막히고, 말씀이 깨달아지지 않고 죄를 지으면서 살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상태인 것입니다. 바울은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는데, 이 때 “복종”은 노예를 다스릴 때 쓰는 용어입니다. 즉 우리를 노예 다스리듯 죄를 정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긴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됐다할지라도 며칠 사이에 죄를 짓고 신앙생활 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해서 신앙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해서 신앙생화라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데,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한 진노로 작용합니다. 진노와 심판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죄가 살아있는 신자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는 매일 매일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 사랑, 감동, 지혜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의 기도가 안되고, 은혜가 없고, 감동이 없으면 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것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지금 저는 살고 죽는 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노라고 할 때, 자신의 죄의 지체들을 죽이는 것을 말하고 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 철저하게 씨름했기에 죄를 과소평가하지 않고 두려워합니다. 철저히 죄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죄와 싸워야 하는 구체적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죄가 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언제 영접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언제 체험했습니까? 그런데 왜 신앙이 식었습니까? 앞의 두 가지는 거의 대답할 수 있지만, 대부분 신앙이 식은 이유를 말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의 착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영접하면 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 보면 죄의 힘이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닙니다. 단번에 케이오 당하는 것 아닙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데도, 환희도 없고, 걱정투성이입니다. 내 안에 천국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죄는 우리 안에 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입니다. 자신 안에 죄와 야합하려는 본성을 보고 날마다 죽노라고 하고, 자신을 죄의 법 아래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본 것입니다. 유혹이 우리의 탐심과 결탁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그런 존재입니다. 그런데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자신 속에 일어나는 사악한 욕망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혹을 받는다 해도 우리 속의 사악한 욕망을 죽이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유혹 받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탐심을 죽이기 위해 은혜라는 제초제를 뿌려야 합니다. 죄는 신자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 아닙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할 때 죄가 사라진 것이 아니요, 우리 속 깊은 곳에서 잠복기에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옛생활로 돌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의 투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은혜 받았다고,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살아나지 못하도록 우리는 계속 죄를 죽여야 합니다. 은혜 받아 산산이 부서진 사람도 그 속에 있는 죄는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를 믿으면서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자기로부터 크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죄와의 싸움은 매일매일 반복되어야 합니다. 은혜를 받아 울었으면 강철과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말씀을 먹으면서 매일매일 죄와 싸워야 합니다. 왕년에 은혜 받으면 뭐합니까? 바울이 고백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새롭다고 하지 않습니까? 날마다 죄와 싸운 승리의 고백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죄를 죽이십시오.
2. 죄가 늘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안달을 하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워달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제 죄의 기질입니다. 신자로 하여금 계속 죄짓도록 하는 것이 죄의 성품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개입합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영이기에 우리가 순결해야지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능하고,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지 않고 신령한 은혜 생활을 말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죄에 대한 진실한 지적이 없으면 하나님을 모시는 참된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완전하고 깨끗하고 순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죄는 우리 속에 역사하여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사람 앞에선 신앙에 대해 청산유수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벙어리가 됩니다.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죄가 역사하는 상태입니다. 신자가 사는 힘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을 때 생깁니다. 인간 자체로는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완전히 부패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한순간도 살 수 있는 것, 호흡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순결해질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을 보면 살 소망이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해야지만 우리는 한 호흡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이즈가 왜 무섭습니까? 그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몸의 면역력이 사라지기 때문에 병균에 쉬게 감염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스스로 이길 영적 면연력이 없이 죄에 끌려 다니는 존재입니다. 삼손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사사였던 그가 두 눈 뽑히고, 남의 나라에서 곡식 갈기 위해 연자 맷돌을 돌리는 짐승이 됩니다. 이게 바로 죄의 노예가 된 상태입니다. 뭘 믿고 담대하게 자신감이 넘쳐 산단 말입니까? 매일매일 은혜 생활 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겨야 합니다. 얼마나 주님의 참사랑을 쫓아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어떻게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죄를 날마다 죽이지 않으므로 핍절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죽이십시오.
3. 죄가 위대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작게 시작된 죄의 씨앗은 최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탐심은 여건만 허락되면 빼앗으려는 것까지 가능합니다. 이성에 대해 음심을 품으면 나중에 꿈꾸는 것은 범하려는 것입니다. 미움은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그 결과가 두려워 억제 당하고 있지만 여건만 되면 상대를 죽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심에 대해 의심이 드는 것도 그 최악의 목표는 우리를 지옥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죄의 능력 때문입니다. 이런 죄의 씨앗이 생길 때마다 끊임없이 제거해야 합니다. “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런 죄의 생각을 했습니다. 주님이 저의 불결한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실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정결하신 것처럼 저도 정결하게 살고 싶습니다”라는 간절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신자 속에서 죄의 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도 있기에 성령님 의지하여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죄는 사라지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확 살아나게 됩니다. 찬양이 쏟아집니다. 기도문이 열리게 됩니다. 눈물이 터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죄를 떨쳐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계속 반복해야 죄가 끔쩍도 못하는 것입니다. 죄의 욕망을 그때 그때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죄를 자라도록 내버려두면 처참하고 끔찍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죄가 그런 것입니다.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제거하지 않고 놔두면 죄가 장성해져서 뽑아낼 수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자라서 자신을 삼키면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없으면 결국은 짐승처럼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와의 싸움을 게을리 하고 있는 동안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은 신도가 많거나 교회건물이 크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 신자들이 교회의 영광입니다.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까? 바울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그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을 날마다 죽였습니다. 우리가 바울보다 나은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철저하게 모든 것 버리고 예수님을 쫓은 바울도 자신의 죄를 죽였습니다. 우리는 더 열심히, 더 간절히 죄를 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도록 한 것 아닙니까?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있고, 우리가 키우고 있는 죄 때문에 예수님이 피흘린 것 아닙니까?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의 씨를 멸절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더러운 죄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보게 해달라고, 죄의 소원을 없애달라고 기도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붙잡으십시오. 내 안에 있는 죄를 죽여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부지런히 은혜 생활해서 죄가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십시오. 내 안의 조는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만 살아 계시도록 간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