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죽임과 거룩한 삶
고후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거듭나고 나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생깁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새로운 본성으로 가능합니다. 죄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감격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나 불신자나 감격 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신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죄로부터의 승리하는 감격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필연성을 모르거나 싸우다가 항상 죄에 졌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로 신자는 영혼의 생명력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교회 출석에서만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이 제사 안 드리는 정도,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만 신자의 표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죄를 죽임으로 누리는 행복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외식입니다. 신자의 내면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지, 하나님이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는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신자이며, 짐승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내 중심대로 살고, 내 욕망대로 살고,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살면서도, 그래서 결국 실패하면서 살면서도 자신이 연약함 때문이나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운운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성장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볼 때 뭔가 깨달은 것 같지만 삶을 보면 깨달았을 때나 깨닫지 못했을 때나 다를 바가 없다면 신앙이 침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고, 추리소설을 보고 대하소설을 보면 그렇게 명쾌하던 머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대뇌의 모든 작용이 멈춰서 지루하고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영성에 있어서는 동물적인 본성에 의해서 야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즉시 어두움 속에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석학들이 없어서, 학문이 발달하지 않아서, 교육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그들은 영혼의 총명은 없고 지성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총명은 어둠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신앙의 참된 도리와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도 바울, 다윗, 요한, 또한 신자들, 목사님들을 보면서 저는 벌거벗은 짐승과 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뭔가 된 줄로 알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총명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즉시 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몸을 깨뜨려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지 골똘히 생각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그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사람들 앞에 무엇을 입고 나갈까, 오늘은 내 몸을 위해 무슨 운동을 할까, 무슨 약을 먹을까, 이것을 좀더 화려하고 멋있게 하기 위해 내가 돈을 어떻게 벌까 고민한다면 예수님이 주신 거룩한 구원의 옷을 입고 돼지우리를 뒹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의 옷을 걸치긴 걸치되 인간의 더러운 정욕과 사랑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신의 전적인 타락,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깨닫지 못하면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죄에 익숙한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의 본성에 빠져 있는 우리가 어떻게 죄를 죽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본성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거듭난 성품을 의지하지 않으면 악한 결과, 즉 자기 의가 나타납니다. 정욕을 없앤다고 무조건 금식한다고 해서 죄가 죽는 것 아닙니다. 금식하고 육신이 정상 컨디션을 찾으면 또 강력하게 살아나는 죄의 정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으니,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구원받은 것이 거룩한 삶을 살 때 확신되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기 속에 계속된 부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마다 고행을 하면서 자신의 정욕을 죽이려고 합니다. 온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건강을 해칠 정도로 금식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구원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금식을 마치고 몸이 회복되면 또 다시 욕망이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더 큰 고행을 하게 됩니다. 더 많은 금식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죄에 대한 승리를 얻지 못하고 수도원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성령님과 우리가 가진 거듭난 성품으로 가능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본성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이 본성은 이제 성령의 소욕을 가지게 됨으로 그 속에서 육신의 욕망과 성령의 소욕이 갈등하게 됩니다. 그때 은혜가 이기든지 죄가 이기든지 하게 됩니다. 동물에게 있어서 천적 개념과 같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둘 다 품는 것이 처음에는 가능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만 승리하게 됩니다. 죄를 온전히 죽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승리를 확보하는 삶입니다. 그 승리가 위대한 성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긴 삶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성자만 누리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죄를 죽이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죄를 온전히 죽이지 않고 가능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모두 녹아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빨려 들어갈듯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자주 막히는 경우는 죄를 온전히 죽이지 못할 때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경건 점검 첫 항목이 “열렬히 기도했는가” 였습니다. 죄를 온전히 죽이고 내면이 하나님을 향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열렬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열렬한 기도는 기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복받침은 죄를 죽일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온전히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말씀을 전할 때, 아무리 죄지은 성도가 빈번히 하나님을 만난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면, 그것은 죄죽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정욕, 죄악을 죽이려는 의욕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죄에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거듭난 본성은 은혜를 적절히 받기만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의 능력이 커서 우리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적절히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계기가 있습니다. 그 유혹을 받음으로 육체의 소욕이 살아나게 됩니다. 유혹은 받자마자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소욕과 결합되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올 때는 미끄러지듯 들어오지만 벗어나려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고 두려움과 공포를 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하지 않았으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죄와 적대적인 생각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중간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은혜를 메말라 버리게 만듭니다. 꾸준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바뀌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좋은 경건 서적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이지 이것이 은혜의 원본이 아닙니다. 예배를 그저 참여한다고, 금식을 한다고 은혜의 원본이 흘러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를 드리고 금식은 했지만 회칠한 무덤처럼 영혼은 썩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내면을 비판하십니다. 탐욕과 쾌락으로 썩어져가도 금식을 할 수 있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겉모습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신앙생활을 해도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단순히 은혜의 도구일 뿐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어디까지 읽었는지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보지 못하고, 찬양을 애끓는 심정으로 부르지도 못한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신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의 수단에 우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성경 읽고, 기도 해도 간단히 신앙을 유지한다면, 하루라도 그 생활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 게을리해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자위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지런히 복종시키면서 영적 생활에 전심해야 합니다. 어느 순강 펑펑 울면서 하나님을 믿고자 해도, 그 결심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부지런히 실천하고, 마음이 감동이 있으나 없으나 성실하게 계속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대가였던 바울조차도 계속 자신을 죽이노라고 하는데, 우리는 과연 그런 성실함이 있나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자랑합니다. 도대체 뭘 자랑한다는 것입니까?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뭘 배운다는 것입니까? 1000명이 교회 나와도 수요예배에 100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건 터지는 곳마다 다 신자들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몸담는 교회가 이렇게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겠습니까? 이런데도 교회는 그 신자들을 계속 위로만 해야 할까요? 도대체 몇 명의 신자가 성경을 읽고 바르게 살고자 합니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항상 게으르게 살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입니까? 새벽기도, 수요예배, 철야기도의 전통이 이제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은혜에 잠기면 잠길수록 은혜의 갈망이 커지게 됩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예배가 멀어지고 성경이 멀어지고 기도가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이기기 위해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왜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죄를 이길 만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에 은혜가 떨어지면 더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기도가 안되면 더욱 몸부림쳐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이기고 은혜가 사라지면서 마음이 돌멩이처럼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평범한 은혜로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결단이 일어나야지만 그 돌같이 굳은 강퍅한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돌같은 신자가 교회에서 뭔가를 한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삶의 진보는 은혜의 수단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삶이 싫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과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죄를 이기게 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삶의 핵심은 죄 죽이는 삶에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큰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는 천국 가는 티켓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애 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검은 까운 뒤집어 쓰고 강단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낮아지는 심령인 것입니다. 죄를 죽일 때 이런 겸손이 생깁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의 죄인들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미처한 벌레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교만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도무지 자신을 깨뜨리고자 하지 않는 마음, 죄를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 오히려 하나님을 찾기보다 나의 본성과 소욕이 원하는 대로 다른 것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날들 동안 우리는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 죄와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거듭나고 나면 우리에게는 새로운 본성이 생깁니다. 성령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주시는 새로운 본성으로 가능합니다. 죄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감격은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은 사람이나 불신자나 감격 없이 사는 것 같습니다. 신자도 하나님이 주시는 죄로부터의 승리하는 감격을 상실했습니다. 이것은 죄와 싸워 이겨야 하는 필연성을 모르거나 싸우다가 항상 죄에 졌기 때문입니다. 그 대가로 신자는 영혼의 생명력이 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신자와 신자의 차이는 교회 출석에서만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경고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백성들로 말미암아 이방인에게서 모욕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이 제사 안 드리는 정도, 교회 출석하는 정도로만 신자의 표지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죄를 죽임으로 누리는 행복을 나타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것은 외식입니다. 신자의 내면의 힘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지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지, 하나님이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는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은 부끄러운 신자이며, 짐승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런 삶을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내 중심대로 살고, 내 욕망대로 살고,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면서 살면서도, 그래서 결국 실패하면서 살면서도 자신이 연약함 때문이나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운운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성장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볼 때 뭔가 깨달은 것 같지만 삶을 보면 깨달았을 때나 깨닫지 못했을 때나 다를 바가 없다면 신앙이 침체되고 있는 것입니다. 드라마를 보고, 추리소설을 보고 대하소설을 보면 그렇게 명쾌하던 머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대뇌의 모든 작용이 멈춰서 지루하고 깨달아지지 않는다면, 영성에 있어서는 동물적인 본성에 의해서 야수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즉시 어두움 속에 떨어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석학들이 없어서, 학문이 발달하지 않아서, 교육이 없어서 문제입니까? 그들은 영혼의 총명은 없고 지성만 살아 있는 것입니다. 총명은 어둠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신앙의 참된 도리와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사도 바울, 다윗, 요한, 또한 신자들, 목사님들을 보면서 저는 벌거벗은 짐승과 같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뭔가 된 줄로 알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총명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즉시 넘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매순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의 몸을 깨뜨려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며,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지 골똘히 생각해야 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그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사람들 앞에 무엇을 입고 나갈까, 오늘은 내 몸을 위해 무슨 운동을 할까, 무슨 약을 먹을까, 이것을 좀더 화려하고 멋있게 하기 위해 내가 돈을 어떻게 벌까 고민한다면 예수님이 주신 거룩한 구원의 옷을 입고 돼지우리를 뒹구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의 옷을 걸치긴 걸치되 인간의 더러운 정욕과 사랑으로 자신의 허리띠를 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신의 전적인 타락,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깨닫지 못하면 반석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항상 기억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죄에 익숙한 우리에게 죄를 죽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죄의 본성에 빠져 있는 우리가 어떻게 죄를 죽일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본성을 주시고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령을 의지하고 거듭난 성품을 의지하지 않으면 악한 결과, 즉 자기 의가 나타납니다. 정욕을 없앤다고 무조건 금식한다고 해서 죄가 죽는 것 아닙니다. 금식하고 육신이 정상 컨디션을 찾으면 또 강력하게 살아나는 죄의 정욕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수도사로서 열심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문제가 있었으니, 자신이 구원받은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구원받은 것이 거룩한 삶을 살 때 확신되는 것이라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자기 속에 계속된 부패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마다 고행을 하면서 자신의 정욕을 죽이려고 합니다. 온 무릎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건강을 해칠 정도로 금식을 합니다. 그러면 정말 구원받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금식을 마치고 몸이 회복되면 또 다시 욕망이 생기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더 큰 고행을 하게 됩니다. 더 많은 금식을 합니다. 하지만 루터는 죄에 대한 승리를 얻지 못하고 수도원을 떠나게 됩니다. 그 후 시편, 갈라디아서, 로마서를 통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죄를 이기는 것은 성령님과 우리가 가진 거듭난 성품으로 가능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거듭난 본성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이 본성은 이제 성령의 소욕을 가지게 됨으로 그 속에서 육신의 욕망과 성령의 소욕이 갈등하게 됩니다. 그때 은혜가 이기든지 죄가 이기든지 하게 됩니다. 동물에게 있어서 천적 개념과 같습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둘 다 품는 것이 처음에는 가능하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만 승리하게 됩니다. 죄를 온전히 죽인 삶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승리를 확보하는 삶입니다. 그 승리가 위대한 성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이긴 삶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성자만 누리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죄를 죽이지 않아도 가능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죄를 온전히 죽이지 않고 가능합니다. 하지만 마음이 모두 녹아드리는 것처럼 하나님께 빨려 들어갈듯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가 자주 막히는 경우는 죄를 온전히 죽이지 못할 때입니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휫필드의 경건 점검 첫 항목이 “열렬히 기도했는가” 였습니다. 죄를 온전히 죽이고 내면이 하나님을 향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열렬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열렬한 기도는 기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복받침은 죄를 죽일 때 가능합니다. 성령의 소욕이 우리 안에 온전히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설교자가 말씀을 전할 때, 아무리 죄지은 성도가 빈번히 하나님을 만난다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씀이 맞다면, 그것은 죄죽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순종, 정욕, 죄악을 죽이려는 의욕을 갖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죄에게 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거듭난 본성은 은혜를 적절히 받기만 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죄의 능력이 커서 우리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적절히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을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계기가 있습니다. 그 유혹을 받음으로 육체의 소욕이 살아나게 됩니다. 유혹은 받자마자 물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육체의 소욕과 결합되지 않습니다. 죄가 들어올 때는 미끄러지듯 들어오지만 벗어나려하면 우리를 에워싸고 마음의 평안을 빼앗아가고 두려움과 공포를 줍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하지 않았으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죄와 적대적인 생각을 갖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령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을 갖게 됩니다. 중간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는 삶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영적 게으름입니다. 게으름은 은혜를 메말라 버리게 만듭니다. 꾸준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은 바뀌게 됩니다. 성령의 소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깨어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좋은 경건 서적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방편이지 이것이 은혜의 원본이 아닙니다. 예배를 그저 참여한다고, 금식을 한다고 은혜의 원본이 흘러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제사를 드리고 금식은 했지만 회칠한 무덤처럼 영혼은 썩어가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내면을 비판하십니다. 탐욕과 쾌락으로 썩어져가도 금식을 할 수 있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겉모습을 장식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신앙생활을 해도 내면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신자가 있습니다. 그런 것은 단순히 은혜의 도구일 뿐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어디까지 읽었는지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서도 육체의 소욕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빛을 보지 못하고, 찬양을 애끓는 심정으로 부르지도 못한다면 이 얼마나 불쌍한 신자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은혜의 수단에 우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성경 읽고, 기도 해도 간단히 신앙을 유지한다면, 하루라도 그 생활을 게을리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 게을리해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자위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부지런히 복종시키면서 영적 생활에 전심해야 합니다. 어느 순강 펑펑 울면서 하나님을 믿고자 해도, 그 결심이 유지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으면 그것을 부지런히 실천하고, 마음이 감동이 있으나 없으나 성실하게 계속 말씀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신앙의 대가였던 바울조차도 계속 자신을 죽이노라고 하는데, 우리는 과연 그런 성실함이 있나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 교회의 성장을 자랑합니다. 도대체 뭘 자랑한다는 것입니까? 세계 교회 지도자들이 한국에 와서 뭘 배운다는 것입니까? 1000명이 교회 나와도 수요예배에 100명도 나오지 않습니다. 사건 터지는 곳마다 다 신자들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몸담는 교회가 이렇게까지 밖에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겠습니까? 이런데도 교회는 그 신자들을 계속 위로만 해야 할까요? 도대체 몇 명의 신자가 성경을 읽고 바르게 살고자 합니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는데, 우리는 항상 게으르게 살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산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뛰어난 사람입니까? 새벽기도, 수요예배, 철야기도의 전통이 이제 교인들의 편의를 위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성도가 은혜에 잠기면 잠길수록 은혜의 갈망이 커지게 됩니다. 하지만 은혜가 사라지면 사라질수록 예배가 멀어지고 성경이 멀어지고 기도가 멀어집니다. 하나님은 죄를 이기기 위해 말씀과 기도라는 은혜의 수단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왜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죄를 이길 만한 은혜를 받지 못하면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배에 은혜가 떨어지면 더 간절히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기도가 안되면 더욱 몸부림쳐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죄가 이기고 은혜가 사라지면서 마음이 돌멩이처럼 딱딱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평범한 은혜로는 깨어지지 않습니다. 무슨 결단이 일어나야지만 그 돌같이 굳은 강퍅한 마음이 사라지게 됩니다. 마음이 강퍅해지는 것은 순간적으로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돌같은 신자가 교회에서 뭔가를 한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삶의 진보는 은혜의 수단에 열심히 참여해야 합니다. 계속 죄 가운데 사는 삶이 싫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과 기도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죄를 이기게 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삶의 핵심은 죄 죽이는 삶에 있습니다. 성경의 가장 큰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가 그 분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너희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신 구원의 은혜는 천국 가는 티켓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애 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검은 까운 뒤집어 쓰고 강단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은 하나님이 위대하시기에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기는 낮아지는 심령인 것입니다. 죄를 죽일 때 이런 겸손이 생깁니다. 우리가 죄를 이기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게 됩니다. 우리가 서 있는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땅의 죄인들이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미처한 벌레와 같은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교만합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도무지 자신을 깨뜨리고자 하지 않는 마음, 죄를 죽이지 않으려는 마음, 오히려 하나님을 찾기보다 나의 본성과 소욕이 원하는 대로 다른 것으로 자신을 만족시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우리는 매일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날들 동안 우리는 죄를 죽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하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