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로부터의 구원
로마서 8장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의 권세에 종지부를 찍는 해방의 사건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역사하되 죄로부터 풀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 죄에 대해서 계속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죄와 타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복음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의 이유는 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인간이 철저히 불행해지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죄를 이기며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단단한 반석위에 기초를 세울 수 있습니다. 과시나 위선의 신앙을 벗어가기 위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게 하셨습니다. 영혼은 피조물 중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이때 인간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명령받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낙원이었고,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면서 일반은혜와 특별은혜의 구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경험이 극대화됐다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최초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 때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마술적 실과가 아니라 그저 금령이 주어진 실과였습니다. 인간은 아직 죄가 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일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순결했지만 분명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과 하나님의 구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실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인간은 순종하는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인간의 명령은 다른 피조물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바로 이름붙이는 사건을 통해 나타납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동일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법을 주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최초 인간이 따먹은 순간에 죄의 세력이 순식간에 몰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조금씩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마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밀려오듯, 흙탕물과 같이 온 땅에 몰려들게 됩니다. 모든 피조 세계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죄의 침투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계가 죄의 권세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법이 있는 목적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법을 어기면서는 죄를 사랑하게 되어서 죄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로 물든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의 독소가 인간 속에 있게 되고 이 육신이 죄를 기뻐하고 즐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속 범죄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 최악의 불행인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어떤 희망도 없게 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범죄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갑니다.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여명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게부터 있었고 그 후손에게 이 구원의 희망이 전수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 속에 하나님과 같은 영혼을 불어넣으시고 교제하길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를 낳았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자신을 닮아가는 아이를 보는 재미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아이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머리끝서부터 변해가더니 끔찍한 구렁이가 됐다 합시다. 얼마나 혐오스러울까요? 이게 범죄한 인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죄악 덩어리인 인간을 바라보실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입니다.
신자의 영적 무기력은 죄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는 제일 먼저 죄를 이기는 신앙 삶을 위해서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위해서는 거듭나서 영혼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죄가 신자의 삶을 파괴하는지 알기에 앞서서 우리가 진정 거듭났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지 않으면 죄와 싸워나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변할 수가 없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주님께 혐오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하지만 거듭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참신자인지 아닌지의 구별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고백하십니까? 나의 죄의 비참함을 느끼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망한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징벌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죄짓는 상태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정말 거듭나셨습니까? 거듭났다면 죄와 싸우고자 합니다. 거기서부터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죄가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로 끝장났다면 왜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런 상태는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신앙생활의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항상 기쁘고, 승리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삶을 산다는 약속은 있지만 슬픔과 우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약속과 현실이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의문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약속과 현실이 너무 차이가 있는 삶, 구원 받은 삶으로 정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삶이 너무 오래 반복되면 그것이 당연한 것인양 살게 됩니다. 풍성한 삶도, 승리도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본문의 “너희”는 누구일까요? 1-2절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또 죽을 수 있을까요? 13절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럼 이런 영적 죽음은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죽음과 같은 무기력과 생명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신자의 삶에 드리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기에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망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아직도 걸어 다니면서 생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겉사람과 속사람이 다 살아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지배를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에 자유함과 누림이 없이 조그마한 일에도 숨죽이면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법”에 놓인 상태입니다. 항상 법망을 피해서 눈치 보며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에 살면 죄의 억압을 받거나 어려움이 생겨도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게 옛 성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송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환경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불안함이 싹 사라지고 다시금 기쁨이 회복됩니다. 불신자가 하는 방법은 이럴 때 술을 퍼먹든지, 질펀하게 놀아보던지, 돈을 맘껏 써서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립니다. 그런 방법은 아무리 미화시키더라도 불안한 자신의 상황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아무리 큰 죄와 고통과 갈등이 있더라도 하나님 의지하면 마음에 큰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자에게 어떻게 다시 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는다고 말합니다. 숙명적으로 죽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의미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누리는 생명력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기도를 할 때 막힘없이 은혜가 쏟아집니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기쁩니다. 찬송이 그렇게 은혜롭습니다. 주님께 뭔가 바치고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따스하게 느껴지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충만합니다. 나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 울지만 행복합니다. 애통하지만 마음이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것의 반대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모든 감동은 사라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시시하게 느낍니다. 죄를 지어도 별 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한마디도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심을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배은망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기도는 사라지고 죄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괴롭습니다. 분명 주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는 없고, 신자로서의 능력도 잃어버리고 죄와는 저항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사단에게 당하고, 죄에게 당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생명만 넘치고 풍성한 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분명하게 영접한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큰 구원의 감격에 빠졌던 때, 첫사랑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 앞에 회개하고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우리의 삶을 돌이킬 때 그 성령의 은혜가 우리 속의 죄를 죽인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도 예민해지고 은혜도 충만한 때였습니다. 회개함으로 단번에 영원한 생명력을 우리가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첫 회개에 생명을 누리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였기에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곧 사라집니다. 이 상태를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신자도 육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 신자가 되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옛 성품이 살아납니다. 옛날 자신이 즐기던 습관들, 쾌락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방종하고 죄 짓는 삶으로 사단을 미끄러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계속 옛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하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각오하게 합니다. 소요리문답 제 1번에서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가 인생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악을 행하면서 자기를 즐기는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죄악이 싹트는 것을 매일 매일 제거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말씀 묵상도 하지 않고 사는 동안 죄는 칡넝쿨처럼 우리를 휘감고 올라 숨통을 조이고 질식시키게 됩니다.
죄가 역사하기 때문에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는 끊임없이 안달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게 죄의 성질입니다.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합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타락에 개입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관리하지 않아서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숨결한 상태에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강조하지 않고 신령한 은혜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맑고 깨끗한 영을 위해서 죄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깨끗해지려는 열망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순결한 교제로 기도에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영적 교제가 있을 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는데,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계속 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탐욕과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 죄가 살아서 반드시 우리를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자신 안에 무엇이 있다고 은혜를 간구하지 않습니까? 한번 얻은 기본적인 신앙으로 버틸 수 있는 신자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잠깐 예배 드려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실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매일 매일 은혜 생활하기를 생명 걸고 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삼키고자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해서 위로 받는다고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죄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속의 죄는 최악의 죄를 위해 우리를 끌어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고, 분노하고, 음욕을 품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최악의 죄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결국 우리를 불신자로 이끌려는 죄의 본성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면서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만약 죄가 주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면 우리는 계속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실지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며 간절한 기도로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령의 법이 우리에게 있기에 그 법을 붙잡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납니다.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회개하고 다시 입술을 열어 죄된 생각을 다 떨쳐 버리고 빛 가운데 살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찬송하게 됩니다. 죄의 욕망의 씨를 그때그때 처리하면 절대 크게 자랄 수 없습니다. 죄의 생각이 반복될 때 계속 죽여야 합니다. 여린 가지는 금방 잘라낼 수 있지만 커다란 나무가 되면 잘라내기 어렵습니다.
에스라 시대에 많은 백성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자녀도 나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니 가족 관계를 정리해야 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 정리했다면 쉬울텐데 끊어버리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죄가 이런 것입니다. 죄가 커지면 끊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은 상태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죄와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사람이 많다고, 목사의 학벌이 높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죄는 죽이고 하나님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삼층천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즐거움 다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좋은 가정 꾸미고, 좋은 차 굴리며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오로지 주님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날마다 자신을 죽이면서 삽니다. 그런데도 죄가 자기를 삼키려 하고,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지체를 날마다 죽이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소원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는 길만이 자신이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로 그 일을 했고, 말씀으로 그 일을 했고, 경건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보다 더 위대하고 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죄에 대해서 우리는 사도바울만큼 예민하지 않습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고 성경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설교시간에 약간의 찔림은 있어도 그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는 지금 살았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죽은 사람은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은 모욕을 받을 것이고 교회는 내가 있기 때문에 수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담을 하고 장난하듯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만 하나님의 편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넓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생명의 약속된 길, 십자가를 가신 예수님의 길은 “날마다 죽노라”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는 길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끔 떠올라도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증오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죽이고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는 청교도의 말처럼, 진리와 함께 사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단의 손톱 자국이 가득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마음 속에서 키우고 있는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일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주님은 온전히 우리가 자신 앞에 나와서 “우리 속에 더러운 죄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죄를 멸하여 주소서.”라고 고백할 때, 죄의 소원과 결박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의 수단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죄에 삼킨바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탐조등으로 우리 속의 죄를 찾아내서 그 죄를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죄의 권세에 종지부를 찍는 해방의 사건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능력과 함께 역사하되 죄로부터 풀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 죄에 대해서 계속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모든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죄와 타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예수님도, 십자가도, 복음도 다 소용이 없습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의 이유는 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죄가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인간이 철저히 불행해지고,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과 죄를 이기며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단단한 반석위에 기초를 세울 수 있습니다. 과시나 위선의 신앙을 벗어가기 위해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고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선사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게 하셨습니다. 영혼은 피조물 중에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이때 인간이 세상을 관리하도록 명령받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낙원이었고, 하나님과 특별한 교제를 나누면서 일반은혜와 특별은혜의 구별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이 경험이 극대화됐다 여긴다면 이것이 바로 최초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그 때 모든 실과는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는 먹지 말라는 명령이 있습니다. 선악과는 마술적 실과가 아니라 그저 금령이 주어진 실과였습니다. 인간은 아직 죄가 없는 상태였지만 하나님일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순결했지만 분명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는 인간과 하나님의 구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실과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고 인간은 순종하는 관계를 유지하길 원하셨습니다. 또한 그렇게 인간의 명령은 다른 피조물에게 주어지고 그것이 바로 이름붙이는 사건을 통해 나타납니다. 인간은 다른 피조물을 다스릴 수는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순종해야 하는 존재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 동일한 피조물이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법을 주신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최초 인간이 따먹은 순간에 죄의 세력이 순식간에 몰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가 조금씩 들어온 것이 아니라 마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밀려오듯, 흙탕물과 같이 온 땅에 몰려들게 됩니다. 모든 피조 세계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죄의 침투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세계가 죄의 권세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법이 있는 목적은 죄를 짓지 말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런데 법을 어기면서는 죄를 사랑하게 되어서 죄에 대해 항거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로 물든 절망적인 상태가 되었습니다. 죄의 독소가 인간 속에 있게 되고 이 육신이 죄를 기뻐하고 즐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계속 범죄하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 최악의 불행인 것입니다. 죄로부터 벗어날 어떤 희망도 없게 됩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범죄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갑니다. 하나님께 반기를 들고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살아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죄지은 인간에게 죄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여명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에게부터 있었고 그 후손에게 이 구원의 희망이 전수되었습니다.
죄는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 속에 하나님과 같은 영혼을 불어넣으시고 교제하길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은 인간은 이제 하나님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이를 낳았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웠습니다. 자신을 닮아가는 아이를 보는 재미로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아이가 변해가고 있습니다. 머리끝서부터 변해가더니 끔찍한 구렁이가 됐다 합시다. 얼마나 혐오스러울까요? 이게 범죄한 인간의 상태였던 것입니다. 죄악 덩어리인 인간을 바라보실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지만, 그 인간을 버리지 못하시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사건입니다.
신자의 영적 무기력은 죄의 속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우리는 제일 먼저 죄를 이기는 신앙 삶을 위해서 거듭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을 위해서는 거듭나서 영혼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죄가 신자의 삶을 파괴하는지 알기에 앞서서 우리가 진정 거듭났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지 않으면 죄와 싸워나갈 수 없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변할 수가 없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주님께 혐오스러운 인생이 됩니다. 하지만 거듭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참신자인지 아닌지의 구별은 무엇입니까? 거듭남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고백하십니까? 나의 죄의 비참함을 느끼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망한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징벌 중 가장 무서운 것은 죄짓는 상태로 우리를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정말 거듭나셨습니까? 거듭났다면 죄와 싸우고자 합니다. 거기서부터 빛 가운데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에게는 죄가 그렇게 예수님의 부활로 끝장났다면 왜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런 상태는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로마서 8장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신앙생활의 의문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항상 기쁘고, 승리하고, 상처 받은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삶을 산다는 약속은 있지만 슬픔과 우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약속과 현실이 동떨어진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점에 의문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약속과 현실이 너무 차이가 있는 삶, 구원 받은 삶으로 정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삶이 너무 오래 반복되면 그것이 당연한 것인양 살게 됩니다. 풍성한 삶도, 승리도 없이 사는 것에 익숙해집니다.
본문의 “너희”는 누구일까요? 1-2절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또 죽을 수 있을까요? 13절에서 죽는다는 것은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을 말합니다. 그럼 이런 영적 죽음은 또 무엇일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죽음과 같은 무기력과 생명 없는 어두운 그림자가 신자의 삶에 드리워진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전에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었기에 생명과는 거리가 먼 사망의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아직도 걸어 다니면서 생활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겉사람과 속사람이 다 살아있는 것이 신자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 지배를 받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일에 자유함과 누림이 없이 조그마한 일에도 숨죽이면서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 “법”에 놓인 상태입니다. 항상 법망을 피해서 눈치 보며 사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성령의 법”에 살면 죄의 억압을 받거나 어려움이 생겨도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게 옛 성품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송을 부르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갑자기 환경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불안함이 싹 사라지고 다시금 기쁨이 회복됩니다. 불신자가 하는 방법은 이럴 때 술을 퍼먹든지, 질펀하게 놀아보던지, 돈을 맘껏 써서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립니다. 그런 방법은 아무리 미화시키더라도 불안한 자신의 상황을 바꾸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아무리 큰 죄와 고통과 갈등이 있더라도 하나님 의지하면 마음에 큰 평화가 찾아옵니다. 이것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생명과 성령의 법 아래 있는 자에게 어떻게 다시 죽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죽는다고 말합니다. 숙명적으로 죽게끔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죽는다”는 의미는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누리는 생명력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말씀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기도를 할 때 막힘없이 은혜가 쏟아집니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기쁩니다. 찬송이 그렇게 은혜롭습니다. 주님께 뭔가 바치고 싶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따스하게 느껴지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도 충만합니다. 나의 생명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기쁘게 할 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모습입니다. 기도하면서 울지만 행복합니다. 애통하지만 마음이 기쁨이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그것의 반대입니다. 말씀을 읽을 때 모든 감동은 사라지고 마음이 굳어져서 시시하게 느낍니다. 죄를 지어도 별 가책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도 되지 않습니다. 완전히 한마디도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신의 인생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꾸심을 보고도 하나님께 감사함이 없이 배은망덕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사니까 기도는 사라지고 죄는 점점 더 강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일이 다가오는 것이 괴롭습니다. 분명 주님이 살아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주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인정할 수는 없고, 신자로서의 능력도 잃어버리고 죄와는 저항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사단에게 당하고, 죄에게 당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결국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정신 차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예수님 믿고 나서 생명만 넘치고 풍성한 삶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분명하게 영접한 경험을 떠올려 보십시오. 큰 구원의 감격에 빠졌던 때, 첫사랑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 앞에 회개하고 성령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우리의 삶을 돌이킬 때 그 성령의 은혜가 우리 속의 죄를 죽인 것입니다. 신앙의 상태도 예민해지고 은혜도 충만한 때였습니다. 회개함으로 단번에 영원한 생명력을 우리가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첫 회개에 생명을 누리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였기에 살아나는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뜨거운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곧 사라집니다. 이 상태를 어떻게 해야 찾을 수 있을까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신자도 육신대로 살 수 있습니다. 신자가 되면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동시에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면 새 사람이 옛 사람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옛 성품이 살아납니다. 옛날 자신이 즐기던 습관들, 쾌락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방종하고 죄 짓는 삶으로 사단을 미끄러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죽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계속 옛 사람이 시키는 대로 살게 됩니다. 적당히 신앙생활하라고 유혹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각오하게 합니다. 소요리문답 제 1번에서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신자가 인생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삽니다. 악을 행하면서 자기를 즐기는 인생을 삽니다.
우리는 죄악이 싹트는 것을 매일 매일 제거해야 합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말씀 묵상도 하지 않고 사는 동안 죄는 칡넝쿨처럼 우리를 휘감고 올라 숨통을 조이고 질식시키게 됩니다.
죄가 역사하기 때문에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는 끊임없이 안달하면서 자신의 요구를 채워달라고 합니다. 그게 죄의 성질입니다. 우리를 유혹해서 죄를 짓도록 합니다. 이 죄는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의 타락에 개입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관리하지 않아서 죄를 짓게 됩니다. 우리는 숨결한 상태에서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죄를 강조하지 않고 신령한 은혜생활을 강조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미신입니다. 맑고 깨끗한 영을 위해서 죄를 고백하여야 합니다. 깨끗해지려는 열망이 없으면 하나님과의 사이를 갈라놓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신자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순결한 교제로 기도에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는 영적 교제가 있을 때 하나님은 은혜의 단비를 주십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셔서 이 자리까지 오게 하셨는데, 내가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계속 됩니다. 하지만 마음 속에 탐욕과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그 죄가 살아서 반드시 우리를 죽이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자신 안에 무엇이 있다고 은혜를 간구하지 않습니까? 한번 얻은 기본적인 신앙으로 버틸 수 있는 신자는 없습니다. 일주일에 잠깐 예배 드려서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실패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매일 매일 은혜 생활하기를 생명 걸고 해야 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삼키고자 합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로해서 위로 받는다고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인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죄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 속의 죄는 최악의 죄를 위해 우리를 끌어가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부러워하고, 분노하고, 음욕을 품는 것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최악의 죄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은 결국 우리를 불신자로 이끌려는 죄의 본성입니다. 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면서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합니다. 만약 죄가 주는 이런 생각이 떠오르게 된다면 우리는 계속 물리쳐야 합니다. 주님이 얼마나 슬퍼하실지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며 간절한 기도로 죄를 물리쳐야 합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성령의 법이 우리에게 있기에 그 법을 붙잡아야 합니다. 자신의 죄악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죽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납니다. 내가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는지 회개하고 다시 입술을 열어 죄된 생각을 다 떨쳐 버리고 빛 가운데 살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놀라운 구원의 능력을 찬송하게 됩니다. 죄의 욕망의 씨를 그때그때 처리하면 절대 크게 자랄 수 없습니다. 죄의 생각이 반복될 때 계속 죽여야 합니다. 여린 가지는 금방 잘라낼 수 있지만 커다란 나무가 되면 잘라내기 어렵습니다.
에스라 시대에 많은 백성이 이방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자녀도 나았습니다. 그러나 은혜 받고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려고 하니 가족 관계를 정리해야 됨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처음에 정리했다면 쉬울텐데 끊어버리기 어려운 상태가 됩니다. 죄가 이런 것입니다. 죄가 커지면 끊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과 같은 상태로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해야 합니다. 죄와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은 사람이 많다고, 목사의 학벌이 높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죄는 죽이고 하나님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빛 가운데서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삼층천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세상의 즐거움 다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는 복음으로 좋은 가정 꾸미고, 좋은 차 굴리며 떵떵거리고 살겠다는 생각을 버렸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오로지 주님 위해서 살기로 작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날마다 자신을 죽이면서 삽니다. 그런데도 죄가 자기를 삼키려 하고,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지체를 날마다 죽이고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죄의 소원과 생사를 건 싸움을 하는 길만이 자신이 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도로 그 일을 했고, 말씀으로 그 일을 했고, 경건으로 그 일을 했습니다. 우리들이 바울보다 더 위대하고 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무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죄에 대해서 우리는 사도바울만큼 예민하지 않습니다. 거의 기도하지 않고 성경은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하지도 못하고 설교시간에 약간의 찔림은 있어도 그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는 지금 살았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며 죽은 사람은 썩어 문드러질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이름은 모욕을 받을 것이고 교회는 내가 있기 때문에 수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담을 하고 장난하듯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그것을 본받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그 사람만 하나님의 편이고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언제든지 넓은 길을 가려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지만 그 길은 멸망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생명의 약속된 길, 십자가를 가신 예수님의 길은 “날마다 죽노라”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는 길입니다. 자신 속에 있는 부패하고 더러운 것들이 가끔 떠올라도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증오하는 마음으로 그것들을 죽이고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는 청교도의 말처럼, 진리와 함께 사는 사람의 얼굴에는 사단의 손톱 자국이 가득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어둠의 권세가 무엇입니까? 마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장본인입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에 품고 마음 속에서 키우고 있는 죄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죽일 만한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송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빈 손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 주소서”
주님은 온전히 우리가 자신 앞에 나와서 “우리 속에 더러운 죄들이 싹트고 있습니다. 이 죄를 멸하여 주소서.”라고 고백할 때, 죄의 소원과 결박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베푸신 은혜의 수단을 붙잡고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지 않으면 우리는 그 죄에 삼킨바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탐조등으로 우리 속의 죄를 찾아내서 그 죄를 죽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