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혈을 지나 오시는 성령님
* 지난 주 성령강림절 서론에서 드렸던 말씀에 많은 분들이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질문들을 하십니다. 그래서 서론에 드렸던 말씀을 좀더 자세하게 올립니다.
요한복음 16장 7절,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부활절 이후 계속된 예수님의 최후 만찬 메시지의 절정은 성령 오심에 대한 약속이십니다. 그래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는 위로로 시작되어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로 끝내시면서 성령의 임재로 인한 해결임을 강조하십니다. 근심에서 평강으로 나아가는 그 터닝포인트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런 전환점의 핵심 말씀이 바로 16장 7절 말씀입니다.
“...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왜 예수님이 떠나 가셔야지만 성령님이 부어지는 것일까요? 여기서 떠나가신다는 것은 십자가에서의 예수님 자신의 죽으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 죽음이 있어야지만 성령 강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것은 성령 때문이십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에 들어서신 이후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의 시험을 이기십니다. 그 후 성령이 충만해지셔서 갈릴리로 나아가십니다. 세례를 통해 공생애 시작과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게 됩니다. 세례 받으실 때에 비둘기 같은 성령이 오셨는데,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셨다고 합니다. 성령은 늘 동행하며 함께 하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순간에도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피를 모두 쏟으실 때 그 피는 성령과 하나되어 역사하는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보혈과 성령은 하나이십니다.
성령 강림이 먼저가 아니라 십자가 보혈이 먼저였다는 사실입니다. 구약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성령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을 때 신자 마음 속에 성령이 오십니다. 회개할 때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이 오십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항상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성령님 항상 오십니다. 이것을 위해 성령이 이 땅에 오셔야 했는데 그렇게 오신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령은 일을 위해서 오셨고 그 일이 끝나면 성령은 떠나가셨습니다. 기름부어 세우실 때 성령이 오시고, 하나님을 너무 슬프게 하면 사울처럼 성령을 거두시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하십니다. 구약의 성령 강림은 항구적이지 않고 떠나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순절날 성령님 이 땅에 오시게 됩니다. 물론 첫 오심은 아니지만 사역을 위해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믿기만 하면 그 성령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런 것은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구약은 성령을 주시려면 직접 하나님이 부어주셨습니다만, 성령 강림 후에는 성령을 한량없이 부으시고 누구든지 믿기만 성령님을 갖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시대에 주어진 놀라운 축복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 죄로부터 정결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부활하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심이라”
마태복음 28장의 이 말씀은 성령을 통한 예수님과의 영원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보혈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도들이 맛보는 축복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함에도 죄인임에도 부패한 본성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을 통해 능력을 공급받고 영적인 세계의 신비한 일들을 알게 하십니다. 말씀의 깊은 계시를 알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신앙 안에서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이 축복이 예수님의 피흘림이 있고나서야 성령의 오심이 있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서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하셨지만, 당신 자신이 성령부음을 받았지만 살아계신 동안에는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만 물 부듯한 성령부음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예수님을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십니다. 필리오케(filioque) 논쟁에서 성자가 성령을 보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피흘리시는 보혈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게 하는 통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 보혈로 구원하실 때 성령이 이 일을 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어야지만 성령부음이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동고동락하시며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죽으시면서도 끝까지 사랑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성령을 물부듯 부으시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먼저 죽으셔야 했습니다. 죄사함의 희생이 있어야 보혈의 효과를 취하여 영원한 능력을 가신 하나님의 역사가 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실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의 축복된 삶의 토대가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우리가 받는 모든 은혜는 성령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형식적인 사람을 일깨워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시는 분, 그 가책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깊은 속사정을 털어놓고 자신의 죄를 아파하게 하시고 통회하게 하시는 분, 통회한 사람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 잠든 자와 방불한, 죽은 자와 방불한 신자에게 새 생명을 주시는 자가 누구이십니까?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놀라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잠들어 있던 차가운 신자들에게도 성령이 오셔서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역사하실 때 그는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찬송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생명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서인지도 모르고 방종하게 살아가던 주님을 모르는 그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어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게 하십니다.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생들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들인지 보게 만드십니다.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게 만드시고, 그들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면 자신을 어떻게 희생하든지 그들에게 하나님의 참사랑을 전하고 싶어하는 열렬한 전도자가 되게 하십니다.
오늘날 도처에 가득차 있는 죽은 자와 다름없는 생기를 읽어버린 신앙생활들을 보십시오. 메말라 버린 영적인 생활과 거룩을 잃어버린 경건의 생활과 세상 사람들과 다름없는 속된 신자들의 방탕한 삶을 보십시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의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이 죽어가는 우리 영혼의 유일한 대안인 것입니다. 거의 안변할 것 같은 사람, 깨지지 않는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 순간에 은혜를 받고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의 키가 바로 성령님의 손에 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성령님이 그에게 오시면 놀랍게 허물어집니다. 옛사람이 허물어지고 완전히 변화하게 됩니다. 그 성령의 역사가 가능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많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은혜만 주시면 새롭게 일어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런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는 구약백성보다 더 큰 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간절히 기도하면 우리를 성령을 통해서 회복시켜주십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간절히 간구하면 은혜 속에서 친밀함을 누리며 살게끔 하시는데 그것이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의 은혜를 받을 때, 침체된 우리를 일으켜 세울 때 주님을 진실하게 믿는 놀라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실 때 우리는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 우리를 위해 흘리신 그 보혈, 그 속죄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성령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온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보혈의 피는 성령을 통해 역사하고 성령은 보혈의 피를 통해 역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을 갈망하지만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성령의 능력의 충만함은 대부분 자신의 느낌과 감정일 때가 많습니다. 주님의 성령이 오시면 주시는 특징이 놀라운 기쁨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도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유원지, 노래방. 성령님이 떠나가셔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 감정상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서 기분이 좋을 수 있습니다. 승진의 소식, 성령이 역사 안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충만하면 너그러워집니다. 이런 기쁨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아도 기뻐하면서 충만하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신령한 것에 대해 갈망하게 됩니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들만이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성령을 충만하게 보내주셨는데도 성령으로 충만해지지 못할까요? 물론 성령충만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강조합니다. 소중한 것을 드려야 성령받는다고도 합니다. 다 일리가 있지만 우선적인 전제가 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에 눈뜰 때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 성령충만이 진실된 성령의 충만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일해도 십자가 보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참된 깨달음이 없이는 영적인 변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거룩한 삶의 능력, 하나님과 친밀한 삶의 능력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적인 위안으로는 안됩니다. 교제 속에서 기쁨을 누리긴 해도 자신의 영혼의 변화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알게 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십자가를 생각하고 그 감정의 분위기에 들어가서는 우리 영혼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럼 감정을 통해 사람이 변하면 고난주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교리를 알고 회고하면서 그 느낌으로 돌아가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보혈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인 필요할까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깨달으려고 애를 쓰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해서 일으키는 변화는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과 성령은 하나이기에 그 도리를 알려고 애 쓰는 사람들은 이 도리를 깨우치는데도 성령이 필요하고,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도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되 보혈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는 점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령은 사람을 변화시키려고 역사하십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셔서 역사하십니다. 인간을 근본적으로 역사하시고 변화시키는 칼이 피묻는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도 보혈의 능력, 신령한 사람으로 계속 사는 것도 보혈의 체험을 하면서 가능합니다. 성령의 놀라운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되지만 사람의 영혼을 새롭게 하고 고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도 복음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은 우리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비록 구원받아도 우리에게는 더 뛰어난 성령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는 감정적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진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충만하도록 우리 안에 오셔서 영적인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고 충만한 성령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5장 5절,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